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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렬공 致仕후 晩年의 行蹟(2004. 4. 2. 안사연 학술발표회 자료. 주회(안)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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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작성일11-10-26 14:52 조회1,73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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忠烈公 致仕後 行蹟에 관한 考察

안동김씨 사이버학술연구회
(편집 : 金柱會,  충렬공 25세손, 안렴사공 21세손)


목     차

Ⅰ. 고찰의 목적 -------------------------------- 1

Ⅱ. 충렬공 치사후 만년의 행적
  1. 치사 후에도 국정 자문 ------------------- 2∼3
  2. 충렬王 과의 갈등 ------------------------- 4∼5
  3. 충렬공의 훈작 ---------------------------- 6∼8
  4. 동녕부 탈환운동 ----------------------------- 9
  5. 불교와 관련 -------------------------------- 10
  6. 충렬공의 고향, 安東 ------------------- 11∼12
  7. 충렬공의 만년 본댁, 개성 앵계리 ----- 13∼14
  8. 충렬공의 성품 -------------------------- 15∼17

Ⅲ. 충렬공 詩文
  1. 충렬공의 詩書 기록 ------------------------ 18
  2. 충렬공의 詩 ---------------------------- 18∼19
  3. 충렬공의 글
    1) 만월봉 요요암 신화상에게 답한글 ----------- 20
    2) 이승휴가 지어올린 단모부에 대한 답신 ------ 21
    3) 김방경撰 초당일기 ? ------------------------ 22
Ⅰ. 考察의 目的
   충렬공께서는 16세에 5대조부 日兢(삼한공신) 공의 음보로 출사하신 이후 出將入相으로 문무반을 넘나들면서 몽고와의 항전, (59-62세)삼별초 토벌, (63세, 70세)일본정벌 등 전장을 누비면서 고려사직의 보전과 영토의 보전, 백성의 안위를 위하여 국정 운영을 주도하였습니다. 70세에 이르기까지 고령에도 불구하고 전장을 누비며 전쟁을 지휘하신 것을 보면 매우 강건하셨음을 알 수 있고, 실제로 89세까지 장수하셨습니다.
   그러나 4차례의 무고를 당하기도 하시고, 한때 대청도에 유배되기도 하였으며, 원나라에는 8차례 이상이나 다녀오시는 등 원나라 지배하의 혼란스럽고 힘든 시기에 관직생활을 하셨습니다.

   옛 선인들의 경우, 현직에 있을 때보다는 주로 유배시에 또는 장수하여 만년에 은퇴하여 한가할 때 문집이나 기록을 많이 남기고 있습니다. 충렬공께서도 1283년 72세로 치사(나이가 많아 벼슬에서 물러남)하시고 1300년 89세로 돌아가실 때까지 17년 동안은 비교적 한가하셨을 것이므로 이 시기에 詩書를 많이 남기셨으리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1281년 일본원정을 다녀 오시는 길에 고향인 안동의 영호루를 지나시면서 지은 詩 한 수가 현재 전하여 오고 있고, 이승휴의 문집 <동안거사집>에는 충렬공께서 만월봉(滿月峰) 요요암(了了庵) 신화상(信和尙)에게 답한 글과 이승휴가 올린 단모부(1295년, 84세)에 대하여 답한 글(1295년, 85세)이 실려 전하고 있습니다.
   이 외에도 충렬공의 만년 본댁이 있던 개성 앵계리·보제사 주변, 만년 정자가 있던 유허지 안동 회곡리와 관련한 기록과 만년에 교유하였던 인물의 문집 등을 계속 찾아 볼 필요가 있습니다.

   충렬공 할아버지를 더 가까이 살펴보기 위하여 여러 문헌에 수록되어 있는 충렬공 할아버지의 1283년, 72세 치사후의 주요 행적을 몇가지 테마로 구분하여 살펴 보았습니다.
   그러나 본 고찰은 충렬공 치사후 만년의 행적 전반에 대해서 개략적인 수준에서 살펴본 것에 불과합니다. 앞으로 테마별로 세분화해서 구체적인 연구가 이어진다면 충렬공 할아버지의 화려하고 다난했던 70세까지의 행적에 치사후의 행적을 모아서 추후 이루어져야 할 충렬공 전기 간행작업에 크게 보탬이 되리라는 기대를 하여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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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 충렬공 致仕후 晩年의 行蹟

1. 致仕 후에도 국정 자문
▣ 충렬공 행장 (1350, 안진 발)
   나라에 큰일이 생기면 퇴관(退官)해 계셔도 언제나 걱정하시고 큰 잔치가 있으면 반드시 초청(招請)을 받아 가시며 큰 회의(會議)가 있으면 반드시 공(公)을 불러 의논(議論)하였고 매년(每年)정초(正初)에는 공경(公卿)과 장상(將相)들이 모두 먼저 와서 배례(拜禮)하였다.

▣《고려사》 제104권 - 열전 제17 >
   현직에서 물러가 한가롭게 된 이후에도 나라일을 집안일 근심하듯 우려하였고 무슨 중대한 문제를 의논할 일이 있으면 왕이 반드시 김방경에게 물어 보았다.
   그러나 그가 나라의 정사에 참여한 지 오래되고 또 금부를 받아서 도원수가 되자 권력이 온 나라에 미쳤다. 그가 지휘한 전장이 전국의 주와 군에 분포되어 있게 되었으므로 부하의 장수들과 군사들은 내상(內廂)이라고 일컬으면서 날마다 그의 문전에서 경비를 섰으며 권세에 아부하고 남의 위력을 빌어 나쁜 짓을 하는 자가 전국을 쏘다니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것들을 말리지 아니 하였다.
   또 그가 일본을 정벌하려 갔을 때에 군공에 대한 관작과 상품의 수여에서 불공평하게 된 것이 상당히 많아서 사람들의 신망을 잃은 일이 있었으며
   또 외손자 조문간(趙文簡)으로 하여금 차신(車信-제국 공주에게 총애를 받은 자)의 딸과 결혼하게 하였는데 사람들이 그가 총애를 받으려고 그런 행동을 한 것이라고 비난하였다.

▣《고려사》 제89권 - 열전 제2 > 후비 2 >
   충선왕(忠宣王)의 계국 대장 공주(大長公主) 보탑실련은 원나라 진왕(晉王) 감마라(甘麻刺)의 딸이다. 충렬왕 22년에 충선왕이 세자로서 원나라에 있을 때 공주에게 장가 들었다.
   (▶1298년, 87세) -----공주는 조비(趙妃)가 왕의 총애를 한 몸에 받고 있는 것을 질투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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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마 후에 어떤 자가 익명 편지를 궁문(宮門)에 붙였는데 그 글에는 "조인규(趙仁規)의 처가 무당을 불러 굿을 하며 저주하여 왕이 공주를 사랑하지 않도록 하고 자기 딸만을 사랑하게 하였다”라고 씌었다. 그래서 공주가 조인규와 그의 처를 투옥하고 또 조인규의 아들 조서(瑞), 조련(璉), 조후(珝)와 사위 박의(朴義), 노영수(盧潁秀) 등과 그들의 처를 가두었다.
   또 철리(徹里)를 원나라에 보내 투서 사건을 알리게 하였는바 -----상락백(上洛伯) 김방경(金方慶) 등과 여러 치사한 재상들까지 공주를 만나 보고 철리를 보내지 말라고 청하였으나 듣지 않았으며 왕도 또한 사람을 보내 청하였으나 그 말도 듣지 않았다.

▣ 고려사절요
무자 14년(1288), 원 지원 25년
   ○전 추밀원부사 홍문계(洪文系)를 섬으로 귀양보냈다. 이때 왕과 공주가 양가의 미녀를 선발하여 원 나라의 황제에게 바치려 하였는데, 문계의 딸도 그 속에 들어 있었다. 문계가 권력층에 뇌물을 써서 모면해 보려 했으나 안 되므로, 총랑(摠郞) 한사기(韓謝奇)에게 말하기를, "내가 내 딸의 머리를 깎으려고 하는데 어떤가." 하니, 사기가 이를 말리며 말하기를, "그 화(禍)가 당신에게 미칠까 두렵다." 하였으나, 문계는 듣지 않고 드디어 그 머리를 깎았다.
   -----재상이 전문(殿門)에 나아가 청하기를, "문계는 나라에 큰 공로가 있는 사람이니 조그마한 잘못으로 중한 법에 처할 수는 없습니다." 하고, 중찬(中贊)으로 치사한 김방경(金方慶)도 병든 몸으로 나가 간청하였으나 듣지 않고 끝내 귀양보냈던 것이다. 수일 후에 홍자번(洪子藩)이 극력 청하니, 명하여 가산은 돌려 주었으나 매우 미워하더니, 뒤에 몽고의 아고대(阿古大)가 오자, 곧 그의 딸을 주었다.

정유 23년(1297), 원 대덕(大德) 원년 5월
   ○왕이 김방경(金方慶)의 집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로부터 옮긴 곳이 한 군데만이 아니었다.

경자 26년(1300), 원 대덕 4년
   ○비록 치사한 뒤에 한가롭게 있으면서도 나라를 집안일처럼 걱정하였으므로, 나라에서도 큰 문제가 있으면 반드시 그에게 자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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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충렬王 과의 갈등
▣ 고려후기 김방경의 정치활동과 그 성격 (1993.8, 류선영, 전남대)
   그는 국내적으로 최고직인 첨의중찬에 올랐고, 원으로부터는 호두금패를 받은 원수의 위치에 있었다. 따라서 그의 막강한 권력장악에 대해 반대세력의 견제가 나왔던 것이다.
   이러한 김방경 무고사건은 크게 보면 원 공주의 거령구나 응방 관계자, 그리고 내료배 등 원실이나 왕실을 배경으로 한 새로운 세력이 기존 세력을 제거하려는 모의로 이해된다. 이와 더불어 이 사건에는 김방경의 세력이 그 만큼 커진 데 대한 충렬왕의 견제도 없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사실들은 김방경의 세력장악에 대한 충렬왕의 일정한 견제가 있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무고 대상자 모두가 삼별초 토벌, 일본정벌 출정자 등 군사적 실력자였던 것은 군사적 실력자들을 견제하려는 고려 내부의 분위기를 보여 주는 것이다.

   -----1281년 제2차 일본정벌로 실패하였다. 이후 김방경은 조인규의 참소를 받았다. 조인규는 왕이 행차할 때 김방경이 술에 취하여 예를 취하지 않고 지나간 것을 들어 김방경을 참소하였고, 이에 김방경은 순마소에 갇혔던 것이다. 이후 김방경은 곧 풀려났지만 그는 다시 사직을 원하였고 마침내 1283년(충렬왕9) 72세의 나이로 물러나고 말았다.
   이후 왕이 김방경에게 자문을 구하기도 하고 또 집으로 거처를 옮기기도 했고, 또 1295년 그가 첨의령, 상락군개국공으로 봉해지고 세자의 청으로 식읍 3천호, 식실봉 3백호가 하사되었다.
   1299년 조비무고사건 때는 궁궐에 나아가 조비를 옹호하는 등 개입을 했고, "퇴임 후에도 항상 나라 일을 걱정했다" 고 한 것처럼, 그는 치사한 후에도 일정하게 정사에 간여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시기는 충렬왕과 충선와의 왕위분쟁으로 조정이 충렬왕파와 충선왕파로 나뉘어 극심하게 대립하던 때였다. 이때 그는 조비를 변호하는 등 충렬왕에 대립하여 충선왕의 편에 섰던 것으로 보인다.
   1300년(충렬와26) 89세로 그가 죽었을 때 그의 장례가 예장으로 치러지지 못했던 것은 그나 그의 아들 흔이 충선왕에 협조함으로써 충렬왕의 미움을 받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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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사절요
임오 8년(1282), 원 지원 19년
   ○2월에 홀치가 죽판궁(竹坂宮)에서 왕에게 향연을 베풀었다. 저물어서 왕이 남문에 나아갔는데, 중찬 김방경이 취하여 말을 타고 지나가니, 곧 명하여 가두었다가 얼마 뒤에 놓아 주었다.

▣ 충렬공 행장 (1350, 안진 발)
   89세에 병환(病患)으로 본댁(本宅)에서 돌아가시니 임종(臨終)시까지 아품이 없이 조용히 앉아서 돌아가시니 유언(遺言)에 따라 안동(安東) 조부(祖父)산소(山所) 근처에 장사(葬事)하게 되었다.
   영구(靈柩)가 떠날 때는 삼관녹사(三官錄事) 80여명이 모두 소복(素服)으로써 제사(祭祀)를 드리고 울음으로서 보내는데 그 때 공(公)을 미워하는 간신(奸臣)들 무리의 모사(某事)로 예장(禮葬)을 치르지 못하여서 -----

▣《고려사》 제104권 - 열전 제17 >
   그는 죽은 뒤에 안동 땅에 묻어 달라고 유언하였다. 당시에 정권을 잡고 있던 자들이 이것을 싫어하여 예식대로 장사 지내는 것을 방해하였다. 그러나 그 후에 왕이 이것은 잘못이었다고 후회하였다.
   충선왕 때에 그를 선충 협모 정난 정국(宣忠協謀定難靖國) 공신 벽상 삼한 삼중 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의 칭호를 추증하고 시호를 충렬(忠烈)이라고 하였으며 명령으로 신도비(神道碑)를 세웠다.

▣ 고려사절요
경자 26년(1300), 원 대덕 4년
   ○8월에 상락공(上洛公) ★방경(金方慶)이 졸하였다. -----나이 89세에 이르도록 머리털이 세지 않았고, 기골이 보통 사람과 달라 추위와 더위에도 앓는 일이 없더니, 마침내 휙 가버렸다. 이때 권력을 잡은 자가 방경을 미워하여 끝내 예장(禮葬)을 저지하였다. 뒤에 시호를 충렬(忠烈)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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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충렬공의 훈작
○ 72세, 1283년
   상락공(上洛公)'의 작호를 더하여 (◀고려사절요)
○ 74세, 1285년
   상락군개국공(上洛郡開國公) (◀충렬공행장1350, ◀고려사 열전),
○ 84세, 1295년
   상락군 개국공(上洛郡開國公) (◀고려사절요, ◀동안거사집)
○ 85세, 1296년
   상락공(上洛公)으로 가봉(加封) (◀충렬공묘지명1300)
○ 87세, 1298년
   상락백(上洛伯) (◀고려사절요, ◀고려사 열전)
○ 89세, 1300년 8월
   상락공(上洛公) (◀김방경행장1350, ◀고려사 세가, 지, ◀고려사절요)
○ 사후7년, 1307년
   상락공(上洛公) (◀김방경행장1350)

▣ 오등작제도 五等爵制度
고려의 봉작(封爵) 제도.
   오등봉작제라고도 한다. 문종 때 중국의 제도를 들여와 국가의 공훈자에게 주기 위하여 두었던 훈작(勳爵)으로,
   훈(勳)에는 상주국(上柱國:정2품) ·주국(柱國:종2품)의 2종류가 있고,
작(爵)에는 공(公) ·후(侯) ·백(伯) ·자(子) ·남(男)의 5등급으로 하였는데,
   특히 공작(公爵)은 공후국공(公侯國公)과 군공(郡公)으로 구별하여 공후국공(정2품)에는 식읍(食邑) 3,000호(戶), 군공(종2품)에게는 2,000호,
   현후(縣侯:후작)에게는 1,000호,
   현백(縣伯:백작)에게는 700호,
   개국자(開國子:자작)에게는 500호,
   현남(縣男:남작)에게는 300호를 급봉(給封)하는 식읍제(食邑制)를 마련하여 이들을 봉건귀족(封建貴族)으로 우대하였다.
   그러나 식읍의 급봉은 거의 형식에 불과하고, 거기에 따로 표시되는 ‘식실봉(食實封) 몇 호’라고 되어 있는 것이 실제로 받는 급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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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렬공 묘지명 (1300, 이진 찬)
   그러나 왕께서 마음속으로 미안(未安)하게 생각하여 병신(丙申=1296)년 겨울에 또 관작(官爵)을 ★상락공(上洛公)으로 가봉(加封)하고 식읍(食邑) 일천호를 봉하였으나 실봉(實封)은 삼백호(三百戶)였다.

▣ 충렬공 행장 (1350, 안진 발)
   을미(乙未=1285)년에 와서는 ★상락군개국공(上洛郡開國公)을 봉(封)하시고 식읍(食邑) 1천호에 식실봉(食實封) 삼백호(三白戶)를 받으셨다. -----

▣《고려사》 제104권 - 열전 제17 >
   이어 첨의령(僉議令)을 더 주었으며 또 ★상락군 개국공(上洛君 開國公), 식읍(食邑) 천 호를 봉하여 실봉(實封) 3백 호를 먹게 하였다.

▣《고려사》 제89권 - 열전 제2 > 후비 2 >
계국 대장공주 -----
   또 철리(徹里)를 원나라에 보내 투서 사건을 알리게 하였는바 -----★상락백(上洛伯) 김방경(金方慶) 등과 여러 치사한 재상들까지 공주를 만나 보고 철리를 보내지 말라고 청하였으나 듣지 않았으며 왕도 또한 사람을 보내 청하였으나 그 말도 듣지 않았다.

▣《고려사》 제31권 - 세가 제31 > 충렬왕 4 >
충렬왕 경자 26년(1300)
   8월 무오일에 ★상락공(上洛公) 김방경(金方慶)이 죽었다.

▣ 고려사절요
계미 9년(1283), 원 지원 20년
   ○12월에 중찬 김방경이 퇴직하기를 청하니, '추충정난 정원공신 ★상락공(推忠靖難定遠功臣上洛公)'의 작호를 더하여 치사(致仕)하게 하였다.

을미 21년(1295), 원 성종(成宗) 원정(元貞) 원년
   ○봄 정월에 홍자번(洪子藩)을 첨의령(僉議令)으로, 조인규(趙仁規)를 첨의중찬으로 삼고, 중찬으로 치사한 김방경(金方慶)에게 첨의령을 가자하였다.
   ○김방경(金方慶)에게 ★상락군 개국공(上洛郡開國公)의 작위를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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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술 24년 (1298), 원 대덕 2년
   ○★상락백(上洛伯) 김방경(金方慶) 등이 공주에게 나아가 철리를 보내지 말도록 청했으나 듣지 않았으며, 왕이 사람을 시켜 청했는데도 듣지 않았다.

경자 26년(1300), 원 대덕 4년
   ○8월에 ★상락공(上洛公) 김방경(金方慶)이 졸하였다.

▣ 동안거사집
   ○★상락군개국공(上洛郡開國公) 식읍 일천호 식실 삼백호 김방경(金方慶)이 만월봉(滿月峰) 요요암(了了庵) 신화상(信和尙)에게 답한 글

   ○이승휴의 단모부
   지금 새로 책봉된 ★상락군 개국공 경조 (上洛郡開國公京兆) 김방경(金方慶)저하는
   -----이해 11월 12일에 안집사(安集使)가 전한바, 영공(令公)이 보낸 편지를 받아보니, "나이가 84세가 되어 앞으로 더 바랄 것이 없는데 세자 전하께서 스스로 생각하시기를, '나라에 공이 있는 노인에게 특별한 상이 없으면 어떻게 후인(後人)들을 권장할 수 있겠느냐'고 여기시고 그 사실을 임금께 아뢰니, 비답(批答)을 내려서 ★상락군개국공(上洛郡開國公)으로 삼았는데, 실로 분수에 맞지 않는다."고 하였다 .
   -----우리 폐하께선 사람은 오직 옛사람을 구하고, 착한 것은 반드시 따른다는 마음으로 기둥과 주춧돌 같은 대신(大臣)의 공로에 보답할 것을 기약해서 마침내 훌륭한 명을 내려서 ★상락군(上洛郡)에 봉하여 공(公)으로 삼으니
   -----춘추가 80에 4년이 지났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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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동녕부 탈환운동
   1269년 최탄의 반란 투항으로 원나라가 동녕부(평양일대 서북지방)를 설치하자 고려에서는 동녕부가 차지한 영토를 되찾기 위해 동녕부가 원래 고려 영토라는 주장을 해야 하는 근거를 마련해야 했다.
   우리 역사의 자주성 회복의 필요성에 의해 1283년에 일연선사는 <삼국유사> 첫머리에 (단군 기록이 있는) [古記]를 인용하여 단군신화를 기록하였고, 1287년에 이승휴는 <제왕운기>를 편찬하면서 역시 단군본기를 인용하여 단군신화를 기록하였다. 169년전인 1114년 김부식에 의해서 편찬된 삼국사기에는 단군기록이 전혀 없음.

   서북지방은 충렬공께서 병마판관으로 재직시 위도 간척사업을 벌인바 있고, 1차무고시 남경유수로 좌천되었으나 서북민의 요청으로 3일만에 다시 복직되기도 하고, 1269년 최탄,한신의 반란때는 몽고군이 서경이남으로 내려가지 못하도록 노력하기도 한 곳으로 충렬공과는 남다른 인연이 있는 지역으로 충렬공의 정치적 배경이 되는 곳이기도 합니다.

   충렬공 께서는 1283년 치사한 뒤에도 고려조정의 원로로서 중요 국정에 대한 자문을 하시면서 나라를 항상 염려하고 계시었고, 만년에 이승휴와 교유가 많았으므로 당시의 일연, 이승휴를 중심으로 한 역사의 자주성 회복운동, 나아가 원나라에 빼앗긴 동녕부 탈환운동에 많은 기여를 하였으리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

▣ 동녕부 (東寧府)  
   고려 서경에 설치된 원나라 통치기관. 1269년(원종 10) 서북면병마사기관 최탄(崔坦) 등이 원종을 폐하고 안경공(安慶公) 창을 세운 임연(林衍)을 친다는 구실로 난을 일으킨 뒤 서경을 비롯한 북계(北界)의 54성과 자비령 이북의 6성을 탈취하여 원나라에 투항하였다.
   이를 계기로 원 세조(世祖)는 이듬해 자비령 이북지방을 모두 원나라의 소유로 한 뒤 서경에 동녕부를 설치하고 최탄으로 동녕부총관을 삼았다. 그러나 이후 고려의 끊임없는 폐지요구와 원이 한족인 명의 흥기에 밀려서 북방으로 쫓겨가는 원명교체기인 1370년(공민왕 19) 이를 폐지하여 요동으로 옮기고 그 지역을 고려에 돌려주었다. 이처럼 동녕부가 요동으로 옮겨졌으나, 그뒤에도 고구려 옛 영토의 회복을 위한 공민왕의 북진정책의 일환으로 대규모의 동녕부 정벌이 추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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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불교와 관련
▣ 《고려사》 제104권 - 열전 제17 >
   ---또 보제사(普濟寺)에다 5백 나한당(五百羅漢堂)을 아주 웅장하고 화려하게 건축하고 낙성식 때에 큰 술잔치 모임을 열었는데 달로화적과 양부(兩府-첨의부와 밀직사의 대신들)가 모두 여기에 참가하였으며 서울 안의 인사들과 부녀자들이 일시에 모두 모였으므로---

▣ 이승휴의 동안거사집
만월봉 요요암 신화상에게 보낸  忠烈公의 편지
   ---상락군개국공(上洛郡開國公) 식읍 일천호 식실 삼백호 김방경(金方慶)이 만월봉(滿月峰) 요요암(了了庵) 신화상(信和尙)에게 답한 글
   지난 번 보내 준 ♠양칙(兩則)의 법어(法語)를 항상 '♠목우자사기(牧牛子私記)'위에 놓아두고 서로 바꿔 가며 보면서, 보고 음미하며 싫어함이 없었으나, 근기(根氣)가 낮고 용렬해서 아득히 내 코를 찾아도 이해가 닿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감히 그것을 가슴에 새겨 두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겸해서 ♠게송(偈頌)을 보내 주었는데 거기에 이르기를, -----
   또 ♠요요암명(了了庵銘)을 보내 주었습니다.  -----

▣ 1302년 아미타불 腹藏 發願文
DB5. 墨書 發願文
淸信戒弟子高麗國永嘉郡夫人金氏
金敏成 / 金孝印 / 宋氏夫人 / 宋耆 / 崔文本 / 上洛公金氏 / 朴氏夫人 / 崔온 / 田氏夫人
靈駕等願承
阿彌陀佛慈悲之力頓脫無明超到樂方見
佛聞法速得解脫還及一切弟子與一切含靈俱霑利樂臨命終時移障碍承
佛神力往生淨域速成妙果還入塵勞廣度群迷謹誌
청신계제자고려국 ★영가군부인김씨
★김민성 / ★김효인 / 송씨부인 / 송기 / 최문본 / ★상락공김씨 / 박씨부인 / 최온 / 전씨부인
영가등원승
아미타불자비지역돈탈무명초도락방견
불문법속득해탈환급일절제자여일절함영구점리락임명종시이장○승
불신력왕생정역속성묘과환입진로광도군미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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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충렬공의 고향, 安東
   충렬공의 고향, 안동의 회곡리와 죽송리와 관련해서는 충렬공 집터와 유허비가 있는 안동 회곡리, 유상하시던 영호루와 상락대, 만년 별장(정자)이 있던 상고산과 상락대, 유택이 있는 죽송리를 기준으로
   충렬공께서 어릴적 성장하신 조부의 본댁, 선대의 세거지, 선영이 있던 곳은 어디인지? 조부 산소가 있다고 하는 안동부서 일식 화림촌, 상락군개국공 봉작시 받은 식읍 1천호, 식실봉 3백호는 구체적으로 어디쯤인지?
   그리고 외조부 송기와 어머니 금관국대부인 금녕송씨가 사시던 곳, 처부 박익정과 처 냉평국대부인 죽주박씨가 살던 곳은 어디인지? 등은 앞으로도 다양한 고찰히 있어야 할 것입니다.

▣ 충렬공 행장 (1350, 안진 발)
   (▶      )이때를 당하여 국가가 바야흐로 서북지방이 크게 위태하여 걱정되므로 북방을 진무하자면 반드시 덕망이 있는 사람을 선택해야만 되기 때문에 公으로써 이에 당하게 하니 여러 성의 백성들이 사랑하고 공경하고 두려워하였다. 이때 마침 모상을 당하여 고향에 가셨다가 돌아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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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병술(丙戌=1286)년에는 조부(祖父=민성 공)께서 애육(愛育)해 주신 은혜(恩惠)를 생각하여 휴가(休暇)를 얻어 성묘(省墓)하실 때 왕(王)이 막내아들(季子) 고공정랑(考功正郞) 순(恂=문영공)을 보내서 태백산(太白山)에 제고(祭告)하니 호위(護衛)하는 공경(公卿)들이 떠나는 길에 장막(帳幕)쳤다.
   아마 분영(墳瑩)에 참배(參拜)하고 돌아오는 길에 향당(鄕黨)의 친구들을 위해 칠 팔일을 머무는데 부로(父老)들에게 말하기를 '가을 일철이 등장(登場)하여 인력(人力)이 부족(不足)한데 어찌 내가 오래 머물러 방해가 되게 하리오!'하고 가마를 명하여 돌아왔다.

▣ 김순 묘지명 (1321, 민지 찬)
   壬戌(임술 1299)년에 남방사신의 명을 받고 선친(=방경 공)을 배행하여 고향 조부(=효인 공) 묘소에 다녀왔으며
   그 이듬해(1300) 8월에 선친(=방경 공)께서 세상을 하직하심으로 遺願(유원)에 의하여 고향 선영에 장례를 모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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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가지
   ○영가지(永嘉誌)」<안동읍지(安東邑誌)>에 의하면 안동(安東)에는 김방경(金方慶)의 유적(遺蹟)이 곳곳에 산재(散在)하고 있다.
上孤山 上洛公金方慶作亭其上, 基礎尙在, 上洛臺 在府西金谷村, 金方慶嘗遊賞地 (「永嘉誌」卷 2, 山川條) 《출전 : 영남 사림파의 형성 pp57/영남대학교 출판부/이수건》
☞‘상고산 위에 상락공 방경 할아버지께서 정자를 지으셨는데 지금도 그 기초가 남아있다.’ 그리고 상락대는 ‘안동부 서쪽 금곡마을에 있는데 김방경이 일찍이 유상한 곳이다.’
   ○상고산(上孤山) : 안동부(安東府)의 서쪽 회곡촌(檜谷村) 앞의 남양담(南陽潭) 위에 있다. 상락공(上洛公) 김방경(金方慶)12)이 그 위에 정자를 지었다는데, 그 기초(基礎)가 지금도 남아있다.
《출전 : 국역 영가지 권지2 pp91》

   ○회곡촌(檜谷村) : 하계곡(下桂谷) 서쪽 몇 리쯤에 있다. 중앙에 작은 시내가 있는데 서쪽으로 흘러 낙동강에 들어 간다. 외로운 산이 강과 시내가 합치는 곳에 있으니 여기가 충렬공(忠烈公)8) 이 정자를 지은 곳이다. 마을 입구에 남쪽으로 향하여 큰 밭이 있는데 유전(流傳)하기를 이는 충렬공(忠烈公)의 집터라고 한다. 충렬공(忠烈公)은 대대로 여기에 살면서 여러 대(代)에 걸쳐 벼슬하였다. 문극공(文克公) 설헌(雪軒) 정오(鄭?)와 대사간(大司諫) 설곡(雪谷) 정포(鄭?)는 외가이므로 와서 살았다.
《출전 : 국역 영가지 권지1 pp56》

   ○상락대(上洛臺) : 안동부 서쪽 25리 회곡촌(檜谷村)의 남쪽 기슭에 있는데 상락공(上洛公) 김방경(金方慶)이 일찍이 유상(遊賞)했기 때문에 이렇게 이름지었다. 동쪽에 마암(馬巖) 절벽이 있어 천길을 깎아 세운 듯 하다. 암서(巖西)에는 석대(石臺)가 반회(盤回)하고 기괴(奇怪)한 경치가 형용하기 어려우며, 아래는 맑은 못에 배를 댈만하고 위에는 수십 인이 앉을 수 있다. 돌 사이에는 비채(菲菜)가 많이 나는데, 전하기는 상락공이 심은 것이라 한다.
《출전 : 국역 영가지 권지2 pp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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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충렬공 만년 본댁, 개성 앵계리
   이규보의 시를 보면 앵계리 주변 풍경을 볼 수 있습니다. 우선 앵계초당(鶯溪草堂) 앞에는 용수산(龍首山) 곡령(鵠嶺)이 있고, 남쪽에 늙은 전나무가 많아 회동(檜洞)이라 일컬었고, 창문으로는 보제사(普濟寺)가 보이는 그런 곳입니다.
   이곳 앵계리는 충렬공의 만년 본댁이 있던 마을이고, 큰 아버지 김창의 절친한 친구였던 이규보가 살던 마을이므로 김창 선조께서도 이곳에 사셨거나 거주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친구를 찾아 자주 들렸을 것입니다.

▣ 충렬공 묘지명 (1300년 이진 撰)
   1300년(대덕4년 경자) 8월 16일에 병환으로 인하여 백목동 영계리에서 돌아가시니, 9월 3일에 예안현 서쪽 산록에 유고에 따라 안장하였다.

▣ 충렬공 행장 (1350년 안진 跋)
   89세에 병환으로 본댁에서 돌아가시니 임종시까지 아픔이 없이 쓸쓸하게 앉아서 돌아가셨고 유언에 따라 안동의 조부산소 (족보에 조부 김민성 묘는 안동부서 一息 화림촌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음) 근처에 장사하게 되었다.

▣ 동국이상국전집 제5권
   앵계(鶯溪)에 거처를 정한 뒤 우연히 초당(草堂)의 한적한 풍경과 두 집안이 서로 오가던 정의를 아울러 서술하여 서편 이웃에 있는 양 각교(梁閣校)에게 주다
앵계에 와 거처하니/鶯溪來卜宅
곡령이 마루에서 마주 보이네/鵠嶺正當軒
늙은 전나무는 남쪽 골목에 울창하고/老檜森南巷
***이 마을에 늙은 전나무가 있기 때문에 이름을 회동(檜洞)이라 하였다.
푸른 소나무는 조그만 담장에 덮였네/靑松覆小垣
***정원의 네 그루 소나무가 담장에까지 뻗쳤다.
상마는 들에 가득하고/桑麻饒野壟
울타리는 산마을을 실감케 하네/籬落似山村
창문은 선궁의 탑을 마주 보고/窓對禪宮塔
***보제사(普濟寺)를 가리킨 것이다.
정각은 주점 문에 임해 있네/樓臨酒店門
복숭아나무 옆에 푸르른 대를 심고/傍桃栽翠竹
가시나무 베어내고 꽃다운 향풀을 보호한다오/剪棘護芳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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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국이상국전집 제3권
   앵계초당(鶯溪草堂)에서 우연히 쓰다
도안에 분향하며 황정경을 읽으니/焚香道案讀黃庭
하루 종일 대사립 두드리는 사람 없다/竟日無人?竹?
천 수 시에서는 부귀에 오만하고/千首詩中驕富貴
거문고 한 곡조에 회포를 기른다/一張琴上養襟靈
용산의 새벽 안개 비보다 짙고/龍山曉霧濃於雨
곡령의 밤 봉화 별만큼 멀다/鵠嶺宵熢遠似星
***앞에 용수산(龍首山) 곡령(鵠嶺)이 있다.
새벽달 희미한데 취한 꿈 깨려 하니/醉夢欲回殘月白
찬 마루에 앉아 솔 그림자 본다/坐看松影落寒廳

▣ 고려사
   또 보제사(普濟寺)에다 5백 나한당(五百羅漢堂)을 아주 웅장하고 화려하게 건축하고 낙성식 때에 큰 술잔치 모임을 열었는데 달로화적과 양부(兩府-첨의부와 밀직사의 대신들)가 모두 여기에 참가하였으며 서울 안의 인사들과 부녀자들이 일시에 모두 모였으므로 식견 있는 사람들은 이를 조소하였다.

▣ 신증동국여지승람 개성부
   연복사(演福寺) : 도성 중앙에 있는데, 옛 이름은 보제사(普濟寺)이다. 큰 전각을 능인전(能仁殿)이라 하며 그 앞 문을 신통문(神通門)이라 한다. 5층 누각이 있었는데 세월이 오래되어 무너졌으므로 지금 성중의 부자 상인이 재물을 내어 고쳐 지어서 채색[金碧]이 휘황하고, 종소리와 목탁 소리가 몇 리까지 들린다.
   ○ 권근(權近)의 탑중창기(塔重創記)에, -----
연복사는 사실 도성 안 시가지 곁에 자리잡고 있는데, 원래 호칭은 당사(唐寺)이다. 방언(方言)에 당(唐)은 대(大)와 비슷하기 때문에 또한 대사(大寺)라고도 한다.
   집이 가장 커서 천여 채에 이르며, 안에 3개의 못과 9개의 우물을 파고 그 남쪽에 또 5층 탑을 세워서 풍수설(風水說)에 맞추었는데, 거기에 대한 설명은 옛 책에 갖추 적혀 있으므로 여기서는 덧붙여 말하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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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충렬공의 성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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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방경 묘지명 (1300, 이진 撰)
   공은 천성이 충직하고 근면하시며 공손하시고 검소하시며 신의있고 후덕하시며 과묵하고 엄숙하시며, -----아침일찍부터 밤늦게까지 게을리하지 않으시고 매사를 결단함에 있어 神明하고 늠름하고 엄숙한 기풍이 있어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하고 무서워하였다.
   혹은 백성들의 원에 따라 서북지방을 여러번 진압하시고 은혜와 위엄을 병용하여 그 지방의 民謠는 지금까지도 공을 사모하고 있다.
   -----공(公)께서 재직(在職)시에 항상(恒常) 밤에는 일찍 주무시고 새벽에는 일찍 일어나 앉아서 아침을 기다리시고 이내 수레에 오르시기를 전과 다름없이 한결같이 하였으며 나라의 안위(安危)에 대하여 항상(恒常) 염려(念慮)하셨다.
   -----무릇 전쟁(戰爭)을 할 때에도 항상 원(元)나라 군마(軍馬)와 더불어 출입(出入)응대(應對)함에 있어 오로지 법(法)에 의해서 처리(處理)하였으며, 비록 온화(溫和)스럽게 하면서도 친압(親狎)하지 않았으며 상대방이 비록 항거(抗拒)하여도 노(怒)하지 않았으며 어려운 일을 당하여도 구차하게 모면하려고 하지않고 죽음이 옳다고 생각하면 삶을 돌아보지 않았으니-----

▣ 충렬공 행장 (1350, 안진 발)
   공(公)은 천성(天性)이 충직(忠直)하고 신의(信誼)가 돈후(敦厚)하며 기량(器量)이 크고 식견(識見)이 넓어서 사소(些少)한 일에 구애(拘碍)되지 않으며 엄(嚴)하고 굳세고 과묵(寡默)하여 비록 자질(子姪)들이라도 감히 가까이 하지 못하였다.
   박식(博識)하고 규범(規範)이 있어 일을 결단(決斷)함에 백에 하나도 어긋남이 없으며 서도(書道)는 가전(家傳)한 법(法)이 있고 시(詩)에도 또한 능(能)하여 기골(奇骨)이 보통이 아니어서 추위나 더위에도 병(病)이 없고 잠이 적으며 늙으셨어도 머리가 희지 않았다.
   자신(自身)을 살펴서 근검하고 낮에는 잠시도 눕지 않으셨으며 세수할 때에는 한 사발 물을 더 쓰지 아니하셨다. 벗들을 잊지 않고 상사(喪事)가 나면 바로 가서 조문(弔問)하며 의식(衣食)은 화려(華麗)함을 배척하였으며 손님이 오면 친소(親疎)의 구별(區別)없이 대접(待接)을 극진히 하고 평생(平生)에 임금의 실책(失策)은 말하지 않았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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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 제104권 - 열전 제17 >
   26년에 그는 병으로 죽었는데 나이는 89세였다. 김방경은 사람됨이 충직하고 진실하고도 후하였으며 도량이 아주 넓어서 사소한 일들에 구애됨이 없었고 엄격하고도 굳세었으며 항상 말이 적었다.
   아들, 조카 등에 대해서도 반드시 예의에 맞게 언동을 취하였으며 옛예식을 많이 알았으므로 일을 처리해 나가는 데 있어서 조금도 차착이 없었다.
자기 몸을 잘 거두고 근면하고 절약하는 기풍을 견지하였으며 대낮에는 드러눕는 일이 없었고 늙었으되 머리칼이 검은 채로 남아 있어 날씨가 춥거나 덥거나 능히 견디어 내었고 병환이라곤 없었다.
   또 옛친구들을 잊어 버리지 않고 누가 죽었다 하면 곧 조상하러 갔으며 일평생 임금의 잘못을 남에게 말하지 않았으며-----

▣ 고려사절요
경자 26년(1300), 원 대덕 4년
   ○8월에 상락공(上洛公) 김방경(金方慶)이 졸하였다. 방경은 안동(安東) 사람으로, 성품이 충성스럽고 곧으며, 미덥고 후덕하며, 엄하고 굳세며, 말이 적었고, 국량이 넓고 커서 소절에 구애되지 않았다. 전고(典故)를 많이 알아 문제를 잘 처결하였고, 근검함으로써 자신을 단속하고, 옛 친구를 잊지 않았다.

▣ 이승휴의 단모부 (1295년)
   험하고 또한 어려울 즈음에도 진실로 문(文)과 무(武)의 지략을 발휘하여 무용이 대단해서 우뚝하게 서서 분발하여 자기 일신의 삶을 돌아보지 아니하고, 사졸과 더불어 고생을 같이하며, 활과 돌을 무릅쓰고 나아갔다.
   -----그렇게 훌륭한 공명을 세우고서도 몸가짐을 겸겸히 하여 항상 자기를 낮추며, 평탄하게 대도를 이행해서, 삼달존(三達尊), 녹야당(綠野堂)의 지위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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Ⅲ. 충렬공의 詩文

1. 충렬공의 詩書 기록
▣ 충렬공 행장 (1350, 안진 발)
   박식(博識)하고 규범(規範)이 있어 일을 결단(決斷)함에 백에 하나도 어긋남이 없으며 서도(書道)는 가전(家傳)한 법(法)이 있고 시(詩)에도 또한 능(能)하여

▣ 고려사절요
경자 26년(1300), 원 대덕 4년
   ○8월에 상락공(上洛公) 김방경(金方慶)이 졸하였다. -----전고(典故)를 많이 알아 문제를 잘 처결하였고, 근검함으로써 자신을 단속하고, 옛 친구를 잊지 않았다.

▣ [신증동국여지승람]제3권 p426<안동대도호부 인물 고려>
   사람됨이 충직(忠直)하고 믿음성이 있으며 관후(寬厚)하여 작은 절차에 구애하지 않았다. 전고(典故)를 많이 알았으며, 자신을 근검(勤儉)하게 다루었다.


2. 충렬공의 詩


山水無非舊眼靑  /산천은 변함없이 옛모습 그대로 있고
樓臺亦是少年情  /루대도(복주루를 말함) 또한 소년시절의 정이 그대로구나
可憐故國遺風在  /고국은 아직도 옛풍습 그대로 남아있고
收拾絃歌慰我行  /아름다운 거문고소리와 노래는 나의 갈길을 위로해 주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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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登福州映湖樓 /안동 영호루에 올라서 --- 도첨의공 김흔 (충렬공 2자)
十載前遊入夢淸 옛날 놀던 일 꿈속에 환하게 들어 오며,
重來物色慰人情 다시 오매 풍경이 인정 위로하네.
壁間奉繼嚴君筆 벽에 걸린 아버님글 이어 쓰니,
堪타愚兒萬戶行 어리석은 아들 만호 걸음이 부끄럽네.

□ 安東客舍北樓次高祖上洛公詩韻 /안동영호루에 고조 상락공 시의 운을 따서
---문온공 척약재 김구용 (충렬공 현손)
先祖題詩字字淸 선조께서 지으신 시 글자마다 맑고 맑아,
重來此日更含情 오늘 다시 와서 보니 정감이 새로워라.
江山似有留連色 안동강산은 옛모습 그대로 어울러 있으니,
仍占春風末肯行 봄바람 기대서서 가기 싫을 뿐일세.

□ <문화유적총람 3편>
【유적명칭】영호루 유허비(映湖樓遺墟碑)
【소 재 지】경상북도 안동시 당북동
영호루 유허비(映湖樓遺墟碑)는 높이 179cm, 폭 61cm, 직경 31cm이며, 김일대가 글을 짓고, 남장수가 글을 썼다. 비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영가부의 남쪽 관문인 이 곳이 영호루의 옛터다. 배야임수로서 앞으로 봉황암과 봉지산이 병풍같이 둘러있고 낙동강 700리 맑게 흐르니 사시지경이 장관이라 춘화 경명에 파형이 문체를 이루고 호월천리에 상하 누경이 영수만경하므로 이름하여 영호루라 하고 영남 삼대루의 하나로 명성이 높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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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충렬공의 글

   지난 번 보내 준 ♠양칙(兩則)의 법어(法語)를 항상 '♠목우자사기(牧牛子私記)'위에 놓아두고 서로 바꿔 가며 보면서, 보고 음미하며 싫어함이 없었으나, 근기(根氣)가 낮고 용렬해서 아득히 내 코를 찾아도 이해가 닿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감히 그것을 가슴에 새겨 두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겸해서 ♠게송(偈頌)을 보내 주었는데 거기에 이르기를,-----
하였는데, 이 말은 감당할 수 없습니다.
   또 ♠요요암명(了了庵銘)을 보여(보내) 주었습니다.
옛날에 ★한 노인이 이르기를, -----
또 ★한 노인이 있어 말하기를, -----
★양무위자(楊无爲子)가 또 노래해 말하기를, -----
삼단어칙(三段語則)에 이어서 말하기를, "청컨대 ★거사는 주각(住脚)하라." 하였습니다.
   이것은 내 경계(境界)가 아닌데, 내 어찌 그것을 감당하겠소. 그러나 내 어리석은 소견으로는 앞의 두 노인은 각기 한 부분을 찬양하고 무위자(無爲子)는 중간에서 노래했으니, 요요의 뜻이 지극하여 그 이상 더할 것이 없습니다.
또 한 노인*3)이 있어 자기의 능력을 헤아리지 않고 운을 이어 지으니 다음과 같습니다.
맑게 개인 가을 하늘에 외로운 새가 날아가니 秋空晴兮孤鳥飛
내 자취를 숨기며 어디로 돌아가려 하느냐. 沒朕迹兮將安歸
회광반조(廻光反照)*4)함이여 못 미침이 없다네. 廻光炤兮无欠餘
명성이 미치지 않음은 심상하게 아는도다. 名不及兮尋常知
내가 한 마디 한 것을 화상은 어떻게 여기는가. 和尙以爲如何
귀위(歸依)할 바를 가르쳐 주길 바랍니다. 伏望小示指歸

*牧牛子私記
고려시대의 고승 지눌은 자신의 딴 이름 별호를 牧牛子로 지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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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이승휴의 단모부(旦暮賦)
   -----지금 새로 책봉된 상락군 개국공 경조 (上洛郡開國公京兆) 김방경(金方慶)저하는
   -----그 처음부터 끝까지의 수전(水戰)·육전(陸戰)의 기이한 계책이 국사(高麗史)에 갖춰 실려 있다. 이해 11월 12일에 안집사(安集使)가 전한바, 영공(令公)이 보낸 편지를 받아보니, "나이가 84세가 되어 앞으로 더 바랄 것이 없는데 세자 전하께서 스스로 생각하시기를, '나라에 공이 있는 노인에게 특별한 상이 없으면 어떻게 후인(後人)들을 권장할 수 있겠느냐'고 여기시고 그 사실을 임금께 아뢰니, 비답(批答)을 내려서 상락군개국공(上洛郡開國公)으로 삼았는데, 실로 분수에 맞지 않는다."고 하였다 .
   제가 공경히 꿇어 엎드려 편지를 받들어 읽고, 거듭 그 사실을 밝혀서 평하여 말하였다.-----우리 공과 같은 분에 이르러서는 이 세상에 사명을 띠고 나와 패왕(覇王)을 보필할 만한 영특한 재능으로 충(忠)과 의(義)와 인(仁)과 용(勇)과 지(知)와 모(謀)가 한 가지도 갖추어지지 않은 것이 없어서, 나가면 장수, 들어오면 재상을 하였고, 동쪽을 정벌하고 북으로 사신을 갔는데 험한 파도가 용솟음 쳤으나 뱃머리는 그 어지러운 것을 헤치고 나아갔고, 아득한 북쪽 변방에 말발굽을 옮기기가 힘들 정도였다. 험하고 또한 어려울 즈음에도 진실로 문(文)과 무(武)의 지략을 발휘하여 무용이 대단해서 우뚝하게 서서 분발하여 자기 일신의 삶을 돌아보지 아니하고, 사졸과 더불어 고생을 같이하며, 활과 돌을 무릅쓰고 나아갔다.
   -----사해의 군주이신 황제가 헌함에 기대어 돌아보고 물었는데, 위엄스런 얼굴을 지척에 대하고서도 재량껏 대답하는 논변을 발휘하여 또다시 천자의 장려를 입게 되었다. 비록 소백(小伯)이 천하를 한 번 바로잡은 것과 진후(晉候)가 세차례 천자를 뵈러 간 것이라도, 어찌 이보다 더 나을 수 있겠는가. 그렇게 훌륭한 공명을 세우고서도 몸가짐을 겸겸히 하여 항상 자기를 낮추며, 평탄하게 대도를 이행해서, 삼달존(三達尊), 녹야당(綠野堂)의 지위에 이르렀다. 이로 말미암아 구중궁궐에서는 공신에 봉하여 대려의 잊기 어려운 맹세를 돈독히 했고, 온 나라에서는 '아형(阿衡)만이 아름다운 명성을 독차지하겠는가?'라는 감탄을 일으켰으니 참으로 그 나이가 높을수록 그 덕은 더욱 높다 하겠다.
   -----삼가 고부(古賦)를 지어서 이름하여 『단모부(旦暮賦)』라 하고 멀리서 상락공 궤장(궤杖) 아래에 바칩니다.
   그 사(辭)는 다음과 같다
-----
춘추가 80에 4년이 지났도다.
-----
맏아들 영공(令公)은 월편(越篇)을 계승했고,
막내아들은 학사가 되어 문 앞에 사람들이 몰려들었도다.
-----

나) 충렬공의 답신
   전에 붙여 준 고부(古賦) 1편을 받았는데, 늙고 병듦으로 해서 미처 답할 겨를이 없었다가, 이제야 화답하여 돈헌(돈=豚밑책바침=軒)에게 부쳐 보인다.-----  원정(元貞)2년(충렬왕22년=1296년)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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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숭의회에서 펴낸 <보유 고려사열전> 에 의하면, 문화류씨 시조 류효금과 차씨 시조 차효전을 설명하는 내용의 참고문헌으로 <金方慶撰 草堂日記 (文化柳氏 世譜)>를 들고 있습니다.
충렬공께서 草堂에 기거하시면서 지은 日記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충렬공의 만년 본댁이 있었던 개성 앵계리에 草堂이 있었는데, 고려시대 이규보의 문집에 보면, 충렬공의 백부 휘孝恭(개명 敞)과 절친했던 이규보가 살던 곳이고, 현재 충렬공 유허비각이 서 있는 안동 풍산읍 회곡동에도 草堂이라는 지명이 있습니다.
전해오는 말로는 <金方慶撰 草堂日記>를 신광사 라는 절에서 목판본으로 간행하였다고도 하는데, 확인된 바는 없습니다.

▣ 고려 해주 신광사
1. 신광사(神光寺) 황해도 해주시 신광리 북숭산(北嵩山)에 있다.
[연혁] 신라 문무왕 때(661-681) 원효와 자장이 창건했다고 하나 신빙성이 없다. ------그러나 이 절이 큰 절로서 면모를 갖춘 것은 1342년(충혜왕 복위 3) 원나라의 마지막 황제인 순제(順帝)가 그의 원찰로 중건한 뒤부터이다.

<신광사사적기>에 의하면 순제는 일찍이 서해의 대청도에서 귀양살이를 했다. 그때 그는 서해의 산천을 두루 돌아보았는데, 해주의 북숭산 기슭에 이르렀을 때 나무와 풀이 우거진 속에 이상한 기운이 빛나고 있음을 보고 찾아가 보았더니, 수풀 속에 한 불상이 있었다. 이에 그는 만약 부처님의 도움을 얻어 환궁하여 등극할 수만 있다면 마땅히 절을 지어 그 은혜에 보답하겠다고 기도했다. 그 뒤 그가 환궁하여 등극하고 2년이 지난 어느날 부처님이 꿈에 나타나서 '어찌 서로 잊을 수 있단 말인가'라고 했다. 그는 이 꿈을 이상하게 생각하다가 중국의 재력을 기울여 이 절을 중창했는데, 그 웅장하고 화려하기가 동방에서 으뜸이었다고 한다.
이 역사에는 원나라의 태감 송골아가 이끄는 37인의 공장(工匠)이 참여했고, 고려의 시중 김석견(金石堅)과 밀직부사 이수산(李壽山:앞에 소개한 책과 이름이 틀림)이 송골아와 함께 감독했다. -----
▲이상 자료 출처:이정 편, 『한국사찰연구』, 불교시대사, 1996년, 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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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글을 찾아낸다는 것, 습유(拾遺)

▣ 완당평전1 (2002, 유홍준, 학고재)

완당의 [반포유고습유] 서문
   ---1813년, 나이 28세 되는 계유년 여름, 완당은 [반포유고습유]의 서문을 지었다. 이 책은 김광익이라는 中人 시인의 시집 [반포유고] 증보판으로, 완당에게 그 서문을 받아 실었다.
   김광익은 자를 천서, 호는 반포라 했으며 軍府의 서리였다고 한다. 그는 비록 중인이었지만 시를 잘 지어 금란사 라는 詩社의 멤버로 활동하였다.

   그가 세상을 떠나고 얼마 안 되었을 때 어린 아들 김재명이 송계 안상덕 선생을 찾아 뵈었더니 "너의 아버지가 남긴 글이 얼마나 되느냐?" 고 물은 것에 제대로 답하지 못한 것을 크게 부끄러워 하며 부지런히 부친의 유고를 모아 [반포유고](1778) 라는 시집을 펴냈다. 그 뒤에 유명한 시인이 된 김재명은 다시 부친의 유고를 열심히 찾아 마침내 120수의 시와 散句 14韻을 수습할 수 있었다. 이에 그 증보판을 [반포유고습유] 라는 이름으로 펴내면서 그 서문을 완당에게 부탁했던 것이다.

   28세의 완당은 원고청탁을 받고 그 서문을 쓰는데, 이 효자의 정성을 칭찬하고 나서 옛글을 찾아낸다는 것, 즉 '습유(拾遺)'가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를 강조한 내용으로 그 서문을 삼았다.
   ---아, 아! 천하의 고서는 습유가 없음으로 해서 고서로서의 가치도 따라서 없어지고 말았다.
   ---전하지 않는 것은 습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지러지고 없어진 것을 지키고 보듬어 실날같은 자취를 지켜가는 100분의 1일 따름이다. 아,아! 비통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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