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주의 객관 중영기(尙州客館重營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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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만 작성일20-04-08 22:04 조회444회 댓글0건본문
【상주의 객관 중영기(尙州客館重營記)】
文貞公 謹齋 안축(安軸)
지정(至正) 3년 계미(癸未)에 나는 상주(尙州)의 수령으로 명을 받고 이해 여름 4월 고을에 부임하여 일을 보았다. 고을은 근래 가혹한 정사에 시달려 백성과 문물은 흩어지고 마을과 거리는 쓸쓸하여 모든 옛날의 관청 학교 신사(神祠) 불사(佛寺)들이 이미 다 무너져 있었는데 오직 객관(客館)만은 완전히 구비되어 번들번들 빛나서 영남지방의 으뜸이었다. 그 청사의 자리나 규모가 크고 웅장하며 넉넉하게 자리잡고 있어서 각각 잘 어울리었다 하겠다. 나는 마음속으로 생각하기를 이것은 반드시 대인 군자가 계획한 것이지 보통 사람이 상식에 따라서 만든 제도가 아니라고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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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물어보니 고올 사람이 말하기를 지금의 동정성랑(東征省郞) 상국(相國) 김영후(金永煦)가 지은 것이라고 하였다. 고을은 사방으로 통하는 거리에 있어 전달하는 사람과 심부름하는 사람들이 쉴새 없이 드나들었다. 그런데 옛적의 객관은 협소하고 더럽고 또 연대가 오래되어 기둥도 이미 부러져서 손님들이 싫어하여 꾸지람을 받으니 주민들이 매우 걱정하였다. 지난 정묘 사월에 김공이 이 고을에 판관으로 오면서 바로 객관을 중건할 뜻이 있었으나 백성들의 괴로움을 딱하게 여겨 차마 공사를 시작하지 못하고 민생의 일에 전념하되 다만 어짊과 애정으로 백성을 사랑하면서 엄중한 규율로 할 따름이었다.
이미 일년이 지나니 한 고을이 덕으로 다스리는 경사에 편안하여 비로소 살아갈 희망이 생겼으니 한번 그 힘을 써서 공에게 은혜를 갚고자 하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이 때에 공이 백성을 부릴 수 있음을 알고 재물을 모으고 공역(工役)을 명하여 기한을 정하니 하류층의 백성들이 발로 뛰고 손으로 춤추듯 기뻐하면서 괴로움을 잊고 일하며 호족과 향인은 머리를 숙이고 눈치를 살피면서 두려워하며 힘을 다하였다. 이런 연유로 일하는 데 백성을 상하지 아니하고 공역 때문에 농사를 해치지 아니하여 얼마 가지 않아 이루어지게 되었다. 객관이 이루어지고 또 관의 서쪽에 작은 관사를 지어 손님을 접대하는 곳으로 삼았기 때문에 비록 사자(使者)나 빈객(賓客)이 많이 온다 해도 의탁할 객관이 있어 고을 사람들은 안심하게 되었다.
아아, 공이 그와 같이 적은 유산으로 이와 같은 큰 건축을 이루었으니 그 힘이 실로 크고 큰 것이다. 비록 백성들의 힘을 사용했으나 실로 공의 지혜에서 나온 것일 뿐이라고 백성들은 지금까지 일컬어온다. 대체로 천하 국가를 다스리는 사람은 그 방책으로 건물을 만드나니 시경(詩經)에 ‘주무유호'(綢繆牖戶)’라는 비유가 있고 서경(書經)에 ‘긍당긍구(肯堂肯構)’라는 비유가 있다. 공이 묘당(廟堂)에 앉아서 경륜과 기강을 세워 진술하고 방책과 계략을 세워 베풀어 왕실을 다시 세운 것을 여기에서 볼 수 있다.
지정(至正) 4년 갑신에 나는 상주(尙州)에서 밀직(密直)으로 내직에 들어가고 공은 도첨의 찬성사(都僉議贊成事)로 승진하였다가 다음해에 좌정승(左政丞)에 올랐다. 나도 다시 찬성사(贊成事)로 옮겨서 항상 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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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따르게 되었다. 공이 나에게 말하기를 “상주의 객관은 내가 경영한 것이고 그대가 일찍이 본 것이다. 간절히 그 사실을 기록하여 후세에 전하고 싶으니 그대가 그것을 기록해 달라”고 하였다. 나는 문학에 미숙하여 그런 성대한 미담을 나타내기에 부족하다. 그러나 엄한 명령을 거듭 어길 수 없어 고을 사람들에게서 들은 것을 간략히 적어 객관의 동헌에 써서 보낸다.
至正三年癸未。余受尙州之命。是年夏四月。到州視事。州近年來。困於苛政。民物流散。里巷蕭然。凡古之廨宇州學神祠佛寺。皆已頹圮。惟客館完具。輪焉奐焉。甲於南方。其廳堂基位。規模布置。宏壯有裕。各得其宜。余心自以爲此必大人君子所指畫。非俗人循常之制也。因問邑人曰。今東征省郞金相國永煦之所營也。州在八達之衢。乘傳奉使者。無虛日也。古之客館。湫隘卑陋。而又年代綿久。棟已撓矣。常爲惡賓所嗔。人甚病焉。越丁卯四月。公出判是州。卽有重新之意。悶生民勞困。不忍興功生事。但以仁愛字民。嚴重律下而已。旣朞。而一邑安於德政。始有聊生之望。思欲一用其力。以報公恩。於是。公知民之可使。鳩材命役。立定期限。小民足蹈手舞。悅而忘勞。豪黨俯首帖耳。畏而竭力。由是。事不傷民。役不妨農。不日成之。館旣成。又闢館之西。別營小館。以待賓之次者。故雖使賓沓至。寄寓有館。邑人安焉。噫。公用如彼孑遺。成如是巨構。力實恢恢。雖用民之力。實出公之智耳。民到于今稱之。夫治天下國家者。其猶作室。詩有稠繆牖戶之比。書有肯堂肯構之喩。公之坐廟堂。立陳經紀。施設方略。而再造王家。於斯可見。四年甲申。余自尙入參密直。公進拜都僉議贊成事。明年。加左政丞。余亦再遷贊成事。日常攀附。公謂余曰。尙之客館。余之所營。而子之所嘗見也。竊欲記其事。以傳於後。子其識之。余文學荒拙。不足以形容盛美。然重違嚴命。略記所聞於邑人者。寄書于館之東軒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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