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온공파 직장 김자정(金自埥)의 장인 좌의정 김종서(金宗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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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만 작성일20-04-13 06:28 조회1,113회 댓글0건본문
◾문온공파 직장 김자정(金自埥)의 장인 좌의정 김종서(金宗瑞)
세종특별자치시 장군면 대교리 산45(주차:237)
김종서[金宗瑞, 공양왕 2년(1390)∼단종 1년(1453)], 자는 국경(國卿), 호는 절재(節齋), 시호는 충익(忠翼), 본관은 순천, 고조는 김통해(金通海), 증조는 김욱(金煜), 조부는 김태영(金台泳), 아버지는 도총제 김수(金陲), 어머니는 대사헌 배규(裵規)의 따님 성주배씨, 배위는 낭장 윤원부(尹元富)의 따님 파평윤씨, 아들은 김승규(金承珪), 김승벽(金承璧), 김승유(金承琉), 사위가 직장 김자정(金自埥)1)이다,
충남 공주시 의당면 월곡리 138-2(유허지:의당초등학교 옆)에서 태어나, 태종 5년(1405) 문과에 급제한 장군이기 이전에 유능한 문관이요, 관료였다.
그는 상서원직장을 시작으로 1433년 함길도관찰사가 된 뒤 7~8년간 북변에서 육진2)을 개척하여 두만강을 국경선으로 확정하는데 민족사적으로 크나큰 공로를 세웠다.
이후 세종 때 형조·예조의 판서를 거쳐 문종 1년(1451) 좌찬성 겸 지춘추관사로서 《고려사》를 찬진하였고, 같은 해 우의정이 되었다. 문종 2년(1452) 《세종실록》 편찬의 감수를 맡았고 《고려사절요》를 찬진하였다. 단종 즉위년(1452) 좌의정이 되어 단종을 보필하다가 수양대군이 야망을 실현하는 데 가장 문제되는 인물로 지목되어 결국 계유정난 때 수양대군 일파에게 살해되었다.
그는 강직하고 엄정하였으며, 고제(古制)와 의례에 밝았고, 관료로서 국왕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아 그 위세가 대단하여 ‘그의 전횡과 독단이 너무 심하다’라는 명나라 사신의 평을 받기도 하였다. 학문과 지략에 무인적 기상을 갖춘 위세는 당시 ‘대호(大虎)’라는 별명을 듣기에 족하였다. 그 뒤 숙종 4년(1678)에 그 후손들이 채용되었고, 영조 22년(1746) 복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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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김자정(金自埥) 가계 : 안동김씨 문온공파조 판전교시사 척약재 김구용(金九容)-성천도호부사 김명리(金明理)-직제학 김맹헌(金孟獻)-①직장 김자정(金自埥) ②첨정 김자양(金自壤)-청백리 김연수(金延壽)로 이어진다.
2)육진(六鎭) : 세종 31년(1449) 김종서(金宗瑞) 장군이 두만강 하류 종성(鐘城)·온성(穩城)·회령(會寧)·경원(慶源)·경흥(慶興)·부령(富寧)에 설치한 진을 말한다. 참고로 사군(四郡)은 세종 15년(1433) 최윤덕(崔潤德) 장군이 압록강 중류 여연(閭延)·자성(慈城)·무창(茂昌)·우예(虞芮)에 설치한 진이다.
【호기가(豪氣歌)】
장백산(長白山)에 기를 꽂고 두만강(豆滿江)에 말을 싯겨
서근 저 선비야 우리 아니 사나히냐.
어떠타 인각화상(麟閣畵像)을 누고 몬저 하리오.
【호기가(豪氣歌)】
삭풍(朔風)은 나무 끝에 불고 명월(明月)은 눈 속에 찬데
만리변성(萬里邊城)에 일장검(一長劍) 짚고 서서
긴파람 큰 한소리에 거칠 것이 없어라.
【(역문)서 김좌상 건치 육진소 후】
조선의 이름난 재상으로서 공적이 두드러진 인물은 김종서(金宗瑞)뿐이다. 공의 공적은 육진을 설치한 것보다 더한 것이 없다. 지금 이 상소를 보니 배치가 굉장하고 논의가 광범위하여, 세상의 범부나 어린아이의 적은 지혜와 얕은꾀로 입만 가지고 때워 국가의 일을 망친 자들이 기가 막혀 주둥이를 감히 벌리지 못하게 하였으니, 또한 일대의 뛰어난 인재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사실은 세종이 사람을 잘 선임하여 이룩하도록 함이 있었기 때문이다. 말년이 되어서는 재상의 공적이 위태로움에 도움 없고 헛되이 죽었으니 어찌된 일인가? 옛 말에 이르기를, “자[尺]도 짧은 데가 있고 치[寸]도 긴 데가 있다.” 하더니 정말 그런 것이다. 그러나 가령 공의 재주가 오늘날에 있었다면 볼만한 것이 있으리라. 남긴 글을 세 번쯤 되풀이하여 보면 구원(九原)에서 살아나기 어려운 탄식이 있다. 아, 슬프도다.
만력 무술년(1598, 선조31) 5월 18일에 운암거사(雲巖居士)3)는 한양의 우사(寓舍)에서 쓴다.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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