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백리에 선정된 외증손-박팽년(朴彭年)-
페이지 정보
김윤만 작성일20-05-05 08:04 조회1,059회 댓글1건본문
청백리에 선정된 외증손-박팽년(朴彭年)-
<?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
● 박팽년(朴彭年):태종 17(1417)∼세조 2년(1456)
할아버지는 목사 박안생(朴安生)이고, 아버지는 판서 박중림(朴仲林)이며, 어머니는 김익생(金益生)의 딸이다. 본관은 순천(順天)이고, 자(字)는 인수(仁叟)이며, 호는 취금헌(醉琴軒)이다.
세종 14년(1432) 생원시에 합격하고, 세종 16년(1434) 알성문과(謁聖文科)에 을과로 급제한 후 1435년 정자(正子)가 되었고, 세종 20년(1438) 삼각산 진관사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이듬해 집현전 부수찬, 1444년 집현전 부교리, 1446년 집현전 교리가 되었으며 세종 29년(1447) 문과 중시(重試)에 을과로 급제하여 세종 때 성삼문·신숙주 등 당대의 유망한 젊은이들과 함께 집현전의 학사(學士)로서 여러 편찬사업에 종사하며 세종의 총애를 받았다.
1448년 강서원 좌익선이 되고, 1450년 집현전 직제학이 되었다가 상소한 것이 문제가 되어 파직되었으나 바로 직제학으로 복직되었고 이듬해 집의(執義)가 되었다. 1452년 집현전 부제학이 되었으며 단종 1년(1453) 좌부승지·우승지·좌승지를 거쳐 이듬해에는 형조참판이 되었다. 1455년 수양대군이 단종의 왕위를 빼앗자 울분을 참지 못하여 경회루 연못에 뛰어들어 자살하려 하였으나 성삼문이 함께 후일을 도모하자고 만류하여 단념하였다.
세조 1년(1455) 충청도관찰사로 근무하면서 청렴하고 근신한다는 평을 들었고 다시 예문관 제학으로 옮겼다가 형조참판이 되어 성삼문·하위지·이개·유성원·유응부·김질 등과 은밀히 단종 복위운동을 추진하였다.
1456년 6월 1일 세조가 상왕인 단종을 모시고 창덕궁에서 명나라 사신들을 위한 연회를 열기로 하자 운검으로 내정된 성삼문의 아버지 등을 이용하여 거사하기로 정하였다가 장소가 비좁아 운검을 두지 않기로 함에 따라 거사가 여의치 않자 거사일을 뒷날 다시 정하기로 하였다.
일이 이상하게 되자 함께 모의하였던 김질이 변심하여 그의 장인인 정창손에게 밀고하자 정창손은 바로 세조에게 보고하여 성삼문 등 다른 사람들과 함께 체포되어 혹독한 국문(鞠問)을 받았다.
그는 모의사실이 드러났음을 알고 떳떳하게 시인하였으며 세조가 태종이 정몽주에게 부르던 노래로 그 마음을 떠보려하자
금생려수(金生麗水)라 한들 물마다 금이 나며
옥출곤강(玉出崑崗)이라 한들 뫼마다 옥이 나랴.
아무리 여필종부(女必從夫)라 한들 님 마다 쫓을소냐.
라는 단시(短詩)를 지어 답하여 그 뜻을 꺾지 않았다.
세조가 그의 재주를 사랑하여 자신에게 모의 사실을 숨기기만 하면 살려주겠다고 은밀히 회유하였으나 그는 이미 죽음을 각오하고 오히려 비웃을 뿐 대답하지 않았다.
또한 그는 세조를 가리켜 상감이라 부르지 않고 나으리라고 부르므로 세조가 노하여 “그대가 나에게 이미 신(臣)이라고 칭하였는데 지금 와서 비록 그렇게 부르지 않는다고 해서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고 하자 그는 “나는 상왕(단종)의 신하이지 나으리의 신하는 아니므로 충청감사로 있을 때 한번도 신자(臣字)를 쓴 일이 없다.”고 대답하였다.
이에 세조가 그가 충청감사로 있을 때 올린 장계를 조사시켜 보니 실제로 신(臣)을 써야할 대목에는 모두 거(巨)를 쓰고 있고 세조 등극 이래 받은 녹(祿)은 하나도 손을 대지 않고 창고에 봉해 두고 있었다고 한다. 그는 온갖 회유를 모두 거절하고 심한 고문을 받아 그달 옥중에서 죽었으며 뒤에 그의 아버지와 동생, 아들들도 모두 처형되었다.
그의 성품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고 말이 적으며 소학(小學)으로 몸을 지켜서 종일토록 단정히 앉아 의관(衣冠)을 벗지 아니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공경하는 마음이 나게 하였다.
그는 집현전 학사로서 ‘집대성’이라는 칭호를 받았다는 기록으로 보아 경국제세(經國濟世)의 명문(名文)이 많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특히 필법에 뛰어나 남북조시대의 종유(鍾繇)와 왕희지(王羲之)에 버금간다 하였다.
그러나 3대가 화를 입은 관계로 오늘날 그에 대한 자세한 행장이나 문집 등이 전해지지 않고 남효온이 사육신의 행적을 적은 추강집(秋江集), 사육신전이나 다른 책에 간헐적인 기록이 남아 있을 뿐이다.
그의 묘는 서울 동작구 노량진동 사육신 묘역에 있는데 그의 묘에는 그저 ‘박씨지묘(朴氏之墓)’라고 새겨진 표석이 있다. 그 이유에 대해 허적(許積)은 “성삼문 등 6신(臣)이 죽은 뒤에 한 의사(義士)가 그들의 시신을 거둬 이곳 강남(노량진) 기슭에 묻었으며, 무덤 앞에 돌을 세우되 감히 이름을 쓰지 못하고 그저 ‘아무개 성의 묘’라고만 새겨놓았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영월 창절서원(彰節書院), 노량진의 민절서원(愍節書院) 등 여러 서원(書院)에 제향되었으며, 그의 절의를 기려 송시열이 지은 <회덕박선생유허비 懷德朴先生遺墟碑>가 있다.
세종 때 청백리에 뽑혔으며 숙종 17년(1691) 관직이 회복되고 충정(忠正)이라는 시호를 내려주고 영조 34년(1758) 다시 자헌대부 이조판서에 증직(贈職)되었다. 정조 15년(1791) 단종에 대한 충신들의 어정배식록(御定配食錄)에 올랐다.
박팽년은 아들들도 함께 처형되었는데 둘째 며느리 이씨는 대구 감영의 종이 되어 갔는데 임신 중이었다. 마침 집에서 거느리고 있던 여자종도 임신 중이었는데 며느리는 아들을 낳고 종은 딸을 낳았는데 아들이면 처형이 될 것을 염려하여 아이를 바꿔서 기르다가 성종대에 와서 둘째 아들의 동서인 이극균이 경상도관찰사로 오자 사실을 고하였다. 관찰사가 보고하자 성종 임금은 죄를 용서하고 이름을 박일산으로 하라고 하였고 천역(賤役)에서 면하고 벼슬을 주었다. 그래서 사육신 중 후손이 전하여 오고 있다.<대동기문> |
<4개 자료 모두 수록되어 있음.>
댓글목록
김영환님의 댓글
![]() |
김영환 |
---|---|
작성일 |
김익생은 우리 안김이 아닙니다.
박팽년의 할머니 즉 박안생의 부인이 전서공의 아들 김휴의 딸입니다.
박안생(배위 김휴의 딸)-박중림(배위 김익생의 딸)-박팽년...
김익생(金益生)[1388~1450]의 본관은 김녕(金寧), 호는 성재(省齋)이다. 김녕김씨 아산 입향조 송암(松菴) 김질(金秩)[1364~1454]의 아들이며, 사육신 중 하나인 충정공(忠正公) 박팽년(朴彭年)의 외할아버지이다. 아버지 김질은 고려가 망하면서 도고면 도산리에 들어와 절의를 지키며 여생을 보냈다. 김익생은 천성이 효성스러워 평생 양친을 지성으로 섬겼다. 또한 문무를 겸비한 충신으로 진충보국하였으며 중추원부사와 예조판서에 올랐다.
[네이버 지식백과] 효자 김익생 정려 [孝子金益生旌閭]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