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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 안동김씨 ‘영가세적(永嘉世積)’ 77년만에 한글 번역 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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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철 작성일23-05-09 20:16 조회32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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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 안동김씨 ‘영가세적(永嘉世積)’ 77년만에 한글 번역 출판

이종근의 행복산책2023. 4. 20. 1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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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가세적(永嘉世積, 옮긴이 박정양, 감수 김경식, 출판 도서출판 조은)'이 77년만에 한글로 번역 출판됐다.
'영가세적'은 안동김씨인 영모당 김질선생과 그의 증손 은송당 김결철, 현무재 김익철 형제의 사적 및 은송당 형제를 그의 증조고인 영모당선생을 모신 도암사(道巖祠)에 배향(配享)하는 문제를 둘러 싸고, 배향 논리를 펴는 전라도 각 고을 유림(儒林)의 의견의 제출과 도암서원(고창군 공음면 소재)의 증건축 사항에 관한 각 향교의 건의와 예조판서 및 정부의 하교한 문서 등을 담은 자료다.
특히 은송당과 현무재 형제의 증조고 사우(祠宇)에 배향하는 그 과정의 여러 고을 향교와 유림의 의견제시는 요즈음 행정과는 달리 민주적이고 심사숙고하는 과정을 볼 수 있는 아주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는다. 도암사·서원(道巖祠·書院)의 중건축에서는 감수자의 5대조고 만수(晩睡, 휘 榮喆) 선생 의견의 제시하에, 증조고이신 회천(泉)선생이 주도적으로 관장했다.
'영가세적(永嘉世積)'은 원래 산재(散在)한 자료를 회천선생께서 수집, 발행하시려다가 병환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가시자, 조고인 보정(普亭 휘 正會)선생께서 서기 1946년 봄에 만수당(晩睡堂: 고창읍 도산리 소재)에서 자비로 출판했다. 원본이 한글판으로 출판되기는 실로 77년만의 일이다.
감수자는 "이제 '영가세적'의 한글판을 내 놓으니, 후손들은 영모당의 효성과 청렴성 그리고 은송당과 현무제의 효성과 형제간의 우애 및 국가에 대한 충성의 모습을 살펴 더욱 흠모하고, 우리 역시 훌륭하신 선조들의 행실을 기리기리 기억해야 하고 전해야 함은 물론, 더욱 조상에 대한 효성과 집안 화목을 기해야 할 것"이다고 했다. 이어 "
혹 남 보기에 조상을 잘 모시고 형제는 물론 집안 화목하는 척하면서 불화를 조성하는 종원이 있다면 거짓은 자신을 숨길 수는 없는 노릇이니, 극히 반성하고 반성하여 조상에 대한 참다운 효성과 집안의 화목을 기 해야 할 것"이다고 했다.
한편 고창군 공음면에는 개갑장터의 옛터가 있다. 조선시대에는 한양에까지 이름이 알려지고 우(牛)시장이 있었던 큰 장터였다고 한다. 최근 들어 조성된 천주교 개갑순교성지(신유박해로 개갑장터에서 순교했던 천주교 신자 최여겸을 기념하는 순교성지)를 설명하는 안내판에 개갑장터가 존재했었다는 사실을 알리고 있을 뿐 장터의 흔적이라고는 없다. 개갑장터는 조선 중종 때 학자로 이름을 떨친 영모당 김질(金質, 1496∼1555)선생의 효행에 기인되어 세워졌다고 한다.
그의 지극한 효행은 명나라에까지 알려졌을 만큼 지극했다. 부모상과 조부모 승종상까지 12년의 시묘살이를 했으며 아버지가 좋아했던 꿩고기를 제사상에 올리려고 눈길을 헤쳐 장에 가는 모습에 감동한 고을 수령의 명으로 장이 열리게 되었다고 한다. 시장이 열린 이후 개갑시장 일대(500미터의 인근에 석교포구가 있었음)는 크게 번성하였다. 많은 사람과 물산이 집산(集散)하였고 최신의 정보를 가진 상인들이 몰려들어 선진된 문물과 정보가 넘쳐나는 지역이 되었다. 여타 지역보다 개방이 앞서 이루어져서 서남해안 최초의 천주교순교가 일어나게 되었으며 농민군들이 장꾼으로 위장해 모여들고 훈련하여 갑오년 동학농민혁명의 시발점이 된 무장기포선언의 배후지가 되었다. 또한 구한말에는 의병활동의 물자보급과 연락처로 활용되어 일제의 눈엣가시 같은 지역으로 낙인찍혔고 일대의 지역이 강제로 해체되는 큰 아픔을 겪고 말았다고 한다./이종근기자

출처:블로그 이종근의 행복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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