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애행적 및 목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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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영 작성일25-06-25 15:18 조회27회 댓글0건본문
낙애행적(洛厓行蹟)
낙애행적(洛厓行蹟)은 병자호란 때, 광주(廣州) 쌍령전투에서 순절한 김몽린의 행적을 수록한 목판본 3권 1책으로, 1862년도에 방예손(傍裔孫)인 종군(宗君) 김영락(金英洛))에 의해 간행되었다. 이조참판 이의익(李宜翼)의 서문(序文)과 지부(知府) 심동신(沈東臣)의 발문(跋文), 그리고 8대손 김영수(金永受)가 쓴 후발(後跋)이 있다.
김몽린(金夢麟, 1584~1636)의 자는 성서(聖瑞). 호는 낙애(洛厓). 상락공 김방경(金方慶)의 후예로 익원공 김사형(金士衡)의 9대손이다. 1621년 동생 몽웅(夢熊)과 함께 무과에 급제한 뒤, 안동 감영의 영교(營校, 장교)로 있을 때인 1637년(인조 5) 겨울, 아우 몽웅과 함께 고을의 병사를 규합하여 광주(廣州) 쌍령전투(雙嶺戰鬪)에 참전하여 청나라 군사와 3일 동안 교전하며 대치하는 동안 적 수십 명을 죽이고 포위되어 1월 3일 장렬히 전사했다.
낙애행적에는 쌍령전투에서 순절한 낙애(洛厓) 김몽린(金夢麟)의 충절을 애도하는 행적과 낙애공이 지은 여러 편의 진중(陣中) 시가 실려 있다. 특히 적에게 포위된 절체절명(絕體絕命)의 절박(切迫)한 순간 죽음에 임해서 지은 낙애 김몽린의 임절시(臨絶詩)는 보는 이로 하여금 눈물을 안 흘리는 사람이 없다고 했다.
○죽음에 임해서 지은 시 臨絶詩
白日臨頭上 丹心隨劒下 未成下句而命絶
백일임두상 단심수검하 미성하구이명절
밝은 태양은 머리 위에 비추고
붉은 마음[丹心] 칼 밑을 쫓네
……
상구(上句)만 읊고 하구(下句)는 미처 완성하지 못한 채 진중에서 목숨을 바친 것이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의지와 태연히 죽음을 맞아들이는 이 같은 우국충정에도 불구하고, 낙애 김몽린의 행적에 대해선 거의 알려지지 않고 있다. 이 외에도 당시 진중에서 지은 시가 여러 편 수록되어 있다.
○사기를 읽고... ‘독사(讀史)’ (낙애공이 여덟살 때 지은 오언절구이다.)
夷齊何等士 虞舜何如人 我是讀書子 願學兩聖人
이제하등사 우순하여인 아시독서자 원학양성인
백이(伯夷)와 숙제(叔齊)는 어떤 인물이었고
우순(虞舜, 순임금)은 또 어떤 인물이었던가?
나 또한 글을 읽은 유자(儒子)로서
두 성인을 배우고 싶구나
○가을날의 감회 感秋
雨細波顔嚬 風高葉語凄 秋來志士感 仰見斗纏西
우세파안빈 풍고엽어처 추래지사감 앙견두전서
가랑비에 수면(水面)이 흔들리고
바람 높아 낙엽 소리 처량하다
가을이 오니 지사(志士)의 감개가 일어
우러러 북두성(北斗星) 서쪽을 바라본다.
○화산의 연적봉에 놀러가서 遊華山硯滴峯 (병산서원 입구)
秋湥楓似錦 淵滀水如藍 色色班衣好 裁出孝子衫
추돌풍사금 연축수여람 색색반의호 재출효자삼
가을이 깊으니 단풍은 비단 같고
연못의 물은 푸르기가 쪽빛 같구나
각양각색 색동저고리 처럼 고우니
부모님 앞에 재롱부릴 옷이나 만들었으면
○우연히 읊음 寓吟
大篁自有種 喬木詎無萠 丈夫許多事 轟雷白日明
대황자유종 교목거무붕 장부허다사 굉뢰백일명
커다란 대나무도 자연히 종자가 있는 법이니
높다란 나무라고 싹이 없을까?
대장부의 수 많은 일들
우레 같은 명성이 백일처럼 빛나는구나!
○감회가 일어 진중(陣中)에서 시를 짓다. 有懷題壁
老柏蒼鷹能擊殿 陰厓隱豹久磨精 士遇盤根爲利器 十年霜刀入鞘鳴
노백창응능격전 음애은표구마정 사우반근위이기 십년상도입초명
늙은 잣나무의 큰 매는 전각을 공격할 듯 기세 등등하고
그늘진 언덕에 숨은 표범은 오래도록 정령(精靈)을 닦고 있네
선비는 위급한 시절을 만나면 쓸모있는 인물이 되는 법이건만
십년동안 간직한 시퍼런 칼날 칼집속에서 울고 있네.
○전대교(前隊校)로 임금의 행차를 호위하며 형제가 함께 군중(軍中)에 있으면서
以前隊校發勤王行兄弟俱在軍中
鳥道旌旗凍不揚 此行同氣死生塲 鐵衣如雪胡風冷 萬里妖氣一劍裝
조도정기동부양 차행동기사생장 철의여설호풍냉 만리요기일검장
새만 다니는 길에 군대 깃발도 얼어 붙어 휘날리지 않으니
이 길은 동기(同氣, 형제)가 함께 죽어야 할 곳이라네.
갑옷은 눈 같이 희고 오랑캐 땅에서 부는 바람 차가워라
만리 밖의 사악한 기운에 한 자루의 칼을 챙긴다.
○쌍령(雙嶺)의 진중(陣中)에서 늙으신 어머니를 생각하며 雙嶺陣中憶老母
萱闈手線換鐵袍 爲忠爲孝兩難全 可憐爲國一死命 敢不甘心食下咽
훤위수선환철포 위충위효양난전 가련위국일사명 감불감심식하연
어머님이 지으신 옷 갑옷으로 갈아 입으니
충(忠)도 효(孝)도 모두 제대로 행하기 어렵구나
가련하구나! 나라를 위해 죽어야 할 운명이라
감히 즐거운 마음으로 음식을 넘기지 못한다.
○강화(講和)를 맺었다는 말을 듣고 서쪽을 바라보며 통곡하다. 聞和議已成西望痛哭
我是我朝喬木臣 忍看城下結和親 男兒一死非難事 大義堂堂質鬼神
아시아조교목신 인간성하결화친 남아일사비난사 대의당당질귀신
나는 우리 조정의 교목(喬木)과 같은 신하거늘
차마 성 아래에서 화친(和親)을 맺는 것을 보는구나
남아가 한 번 죽는 것이 어려운 일은 아니니
당당하게 대의(大義)를 귀신에게 묻노라
○쌍령(雙嶺)의 진지(陣地)에서 지형이 불리함을 한탄하며 雙嶺陣歎地形不便
江盤峽束鐵甕如 伸縮干戈一屋廬 但聞將軍趍下令 無端兵馬一池魚
강반협속철옹여 신축간과일옥려 단문장군추하령 무단병마일지어
둘러친 강과 좁은 협곡(峽谷)이 철옹성 같지만
방패와 창을 휘두르다 보면 한 채의 집처럼 좁다네.
장군께선 명령을 내리는 일에만 바쁘다는데
병마(兵馬)를 연못의 물고기처럼 가둬두지 마시오.
낙애행적(洛厓行蹟) 목판
[문집 구성]
정확한 간행 과정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으나 이의익(李宜翼)의 서문에서 살펴보면 후손들이 흩어진 사적을 수집하여 편집, 간행한 것으로 보인다. 간행 시기 역시 정확하지는 않으나 서문을 쓴 이의익이 경연홍문관춘추관동지의금부사(經筵弘文館春秋館同知義禁府事)의 관직을 지낸 것이 1857년~1860년이며, 이천유(李天裕)가 실기(實記)의 후서(後敍)를 쓴 때가 1859년이며, 발문에 ‘壬戌秋哲廟~知府沈東臣小識’에 나오는 철종 임술년이 철종 12년(1863)임을 미루어 1863년에 <낙애행적>이 간행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목판 정보]
경북 안동의 안동김씨 낙애공 문중에서 한국국학진흥원에 기탁하였다.
전체 20장이 결락 없이 남아 있다.
[형태적 특징]
책판의 제작에는 돌배나무가 사용되었다. 사주쌍변(四周雙邊)의 광곽(匡郭)을 새겼으며, 광곽 안에 세로로 계선(界線)을 긋고 글을 새겼다. 서문은 6행 12자로 새겼으며, 본문의 글씨는 10행 20자로 판각하였다. 글씨를 쓴 사람은 알 수가 없다. 책을 인출한 이후에 판면의 먹을 깨끗하게 세척한 상태로 보존하여, 현재도 매우 깨끗한 상태로 남은 책판이다.
[병자호란과 쌍령전투]
병자호란 은 1636년 12월 28일부터 1637년 2월 24일까지 조선과 청나라 사이에 벌어진 전쟁이다. 이 전쟁에서 가장 치열했던 전투는 1637년 1월 2일에 쌍령에서 벌어진 전투이다. 이 전투에서 조선군은 청군에 대패하였으며 한국 역사 3대 패전 (칠천량해전, 쌍령전투, 현리전투) 중 하나로 꼽힌다. ‘쌍령(雙嶺)’은 경기도 광주의 3번 국도 동쪽(현 곤지암)에 있는 크고 작은 두 개의 고개를 말한다.
남한산성에 고립되어 있던 인조를 구원하기 위해 경상좌병사 허완(許完)과 우병사 민영(閔栐)은 급히 군사들을 모집하였다. 상주영장(尙州營將) 윤여임(尹汝任), 안동영장(安東營將) 선세강(宣世綱), 그리고 안동 영교(營校) 김몽린(金夢麟)과 아우 김몽웅(金夢熊) 형제도 이 대열에 합류하여 출발하였다.
남한산성으로 향하던 이들은 1월 2일 쌍령(雙嶺)에 도달하였고, 각각 허완과 민영이 이끄는 조선군은 고개 양쪽에 진을 쳐 목책을 세워 적의 공격에 대비하였다.
이에 남한산성 인근에 주둔하던 청군이 조선군의 동태를 살피기 위해 약 30여 명의 기마병으로 구성된 척후병들이 쌍령의 목책에 다다르자 이를 발견한 조선군은 곧바로 발포하여 적 척후병의 사기를 꺾었다. 그러나 이 당시 조총에 숙련되지 못했던 조선군은 첫 발포에서 소지하고 있던 모든 탄환을 거의 다 소진해 버렸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청군이 조선군의 목책을 넘어 급습하였고, 이에 놀란 조선군은 탄약을 다 써버린 조총들을 내던지고 무질서하게 도주하기 이르렀다.
오직 안동 영교인 김몽린(金夢麟)만 끝내 도망하지 않고 “아직 오랑캐의 간을 도려내지 않았는데, 이 몸이 먼저 나라 위해 목숨을 바치는구나 未剪仇肝身殉國” 라고 탄식하며 목숨 바쳐 싸울 것을 외쳤다.
이 전투에서 중과부적으로 경상 병사 허완과 민영, 그리고 김몽린 형제 모두 장렬히 전사했다. 조선군이 궤멸된 상황에서 남한산성을 구원할 군대는 사실상 전무한 상황이었다. 남한산성에서 40여 일을 버티던 인조는 결국 청 태종에게 삼전도에서 굴욕적인 항복을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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