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묘를 옮긴 사람들은 무사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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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발용 작성일05-12-29 22:28 조회2,504회 댓글3건본문
본 자료는 우리 홈에 몇 차례 소개되었던 서울시 유형문화재 한글고비에 대한 것으로, 고비(古碑)의 주인공인 성주이씨 문중 홈에, 고령신씨 신경식님께서 문의한 내용을 성주이씨 이상복님께서 답해주신 내용입니다.
한글고비의 주인공 이윤탁의 배위가 고령신씨이며 고비를 세운 아들 이문건의 배위는 안동김씨입니다.
고령신씨 게시판(대화방)에서 옮겨왔습니다.
■ 건드리지 마. 다쳐! 한 마디로 “건드리지마. 다쳐!” 이렇게 말하고 있는 비를 지역개발이라는 명목 하에 사람들이 살살 ‘건드리게’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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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합장묘에 세울 묘갈은 합장 결정 직후부터 새기기 시작해 1536년 3월 17일 절반 정도 새기고, 같은 해 4월 16일 완성을 보게 된다. 그리고 5월 4일 이문건은 드디어 모든 석물들을 묘역에 세운다. 묘갈을 새기고 세우는 데만 5개월 정도 소요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가 어떤 식으로 묘갈을 새기고 또 세웠는지는 그의 일기에 모두 기록되어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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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의 기록에서 드러나듯 한글고비는 노원의 야산 중턱에 있는 어머니 묘 옆 여막에서 시묘살이를 하며 아버지 묘 이장 작업까지 도맡아야 했던 이문건이 한 겨울 추위, 육신의 수고로움과 고통, 마음의 비통함을 삭여가며 한 자 한 자 직접 파 내려간 노력과 정성의 결정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한글고비 좌우 측면에서 보는 경계문은 외압에 의해 어쩔 수 없이 한 번 옮겨야 했던 아버지의 묘를 두 번 다시 옮기는 그런 불행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이문건이 정해놓은 일종의 방어장치, 그것도 아주 개성 있고 재치 있는 방어장치였던 셈이다. |
■ 그의 묘를 옮긴 사람들은 살아남았다. 그러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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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김항용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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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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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고비를 세운 묵재 이문건의 배위는 안동김씨 제학공파의 명인이신 기묘사화의 명현 영상공 휘 석(錫)의 누이요 증참판공 휘 언묵(휘 彦默-시흥시 소래산에 묘가 있음)의 따님이십니다.
제학공파의 세칭 5갑(충갑, 효갑, 우갑, 제갑, 인갑) 선조님들은 바로 이 한글 고비를 만드신 주인공이신 고모부 묵재 이문건 선생에게서 많은 하교를 받으셨습니다.
우리 5갑 후손들은 이 분을 잊을 수 없습니다.
위의 한글 고비는 지난 2004년 11월 경 주회 대부와 다녀온 바 있습니다.
발용대부님 좋은 자료 소개에 감사합니다.
김태서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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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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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이 시점에 서면 언제나 느끼는건
어제같이 한해를 시작 했는데...
책장 넘기듯이 넘어가는 시간들이
참으로 아쉽네요.
한 해의 마무리 잘 하시고
늘 건강하시길 빕니다
솔내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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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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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재미난 사연 잘 읽었습니다.
발용씨!! 감사합니다.








"파라오의 평안을 교란하는 자는 죽음을 맞이하리라."
그런데 이곳 서울에서도 불암산 자락 한 야산에 조성된 16세기 한 사대부의 묘역 이전 문제가 묘 앞에 세워진 묘갈(墓碣) 표면에 심상치 않은 문구가 새겨졌다는 사실 하나 때문에 10년 동안 세간의 뜨거운 시선을 모은 적이 있었다. 1990년대 중계동·하계동에 대단위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고 단지 사이로는 지하철 4호선 상계역에서 미아사거리를 잇는 6차선 간선도로가 개설되려는 바로 그 시점이었다. 
서울시 노원구 하계동 산12번지.
그러나 정작 그 자신은 연산군 7년(1501년) 봄 문과(文科)에 급제한 직후 외교문서를 관장하던 승문원에서 실무 수습 단계(權知 副正字)에 있다가 같은 해 섣달 26일 병환으로 40세에 갑자기 세상을 뜬다.
돌아가신 분(亡者)을 추념하기 위해 분묘 앞에 세운 일종의 표지석이라는 점도, 6품 이하 관료의 묘 앞에 세워진 것이어서 비 몸돌(碑身이라고 한다) 위 부분이 약간 모가 나긴 했으나 약간 둥그스름하게 깎인 모양으로 조성되었다는 점도 다른 묘역의 그것과 대체로 같다. 그 밖에 방부(方趺, 사각의 받침돌)에 비신을 끼운 수법이라든지 그 크기도(비 몸돌 높이 143.5cm, 폭 64. 5cm, 두께 19. 3cm) 다른 일반 관료의 그것과 크게 다를 것이 없다.
먼저, 한글고비는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의 한글 비로 평가되고 있다. 그리고 조선시대까지만을 놓고 보면 우리나라에 현전하는 유일한 한글비이기도 하다. 독자적인 우리의 글이 없기도 했지만 우리나라 최초의 금석문으로 알려진「광개토대왕비문」도, 진흥왕의 한강유역 장악이 기록된「북한산진흥왕순수비」도 사실 모두 일반인은 알기 어려운 한문으로 되어 있다. 한글이 창제된 이후에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한글은 사대부들에 의해 중글·암클 등으로 비하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일반 평민도 아닌 사대부가, 그것도 편지글도 아닌 부모님의 묘 앞에 비를 세우면서 한글로 된 비를 세워 놓았으니 비 건립 당시는 물론이고 오늘날 기준으로 보아도 한글고비는 매우 이례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물론 비의 앞과 뒤, 그리고 우측면에 한문으로 된 비문이 새겨져 있기는 하지만 한글고비 좌측면에 순수 한글로 쓰여진 다음과 같은 내용의 경계글은 16세기 한글 고어와 서체를 연구하는 데 있어 거의 유일한 금석문 자료였던 것이다.

지방마다, 나라마다, 문화권마다, 그리고 각 시대마다 죽음을 맞이하고 죽은 자를 이 세상에서 떠나보내며 그들을 추념하는 의식과 태도는 각기 조금씩 다 다르지만 다른 어떤 분야보다도 보수적이고 변화하지 않는 분야가 바로 이 상례(喪禮)라고 한다. 따라서 상례와 결부된 부분들은 자칫 형식화되어버릴 우려가 있다. 묘갈 하나를 세우는 것도 마찬가지가 될 공산이 컸다. 그러나 한글고비에게 이 세상 빛을 보여준 장본인인 이문건은 작고 하찮아 보이는 것에서도 그리 하지 않았다. 그는 부모의 백(魄)이 묻히고 혼(魂)이 깃든 묘역이 훼손당할 것을 염려하여 비 뒷면 끝에 한시를 지어 새기고 그것도 모자라 좌우로 다시 식자층과 한자를 모르는 사람 양쪽을 겨냥, 절대로 이 비를 건드리지 말라고 애원하다시피 하는 글을 써 놓았던 것이다. 마음이 있어도 이렇게 독특하게 표현해 놓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또『중종실록』을 보면 이문건은 중종의 두 번째 비인 장경왕후(章敬王后)의 능(禧陵) 조성 당시 장경왕후 소생의 세자(훗날 인종)를 해하고 다른 왕자(福城君)를 세자로 세우려는 경빈 박씨와 그 추종자들이 광(壙)을 파면서 그 속에 큰돌이 박혀 있는 것을 알고서도 그대로 능을 조성하였으므로 정상을 철저히 조사하여 관련자를 처벌하고 능을 이전할 것 등을 왕 앞에서 주장, 한동안 조정에 큰 파란을 일으킨 적도 있었다. 이 때가 중종 32년(1537년)이니 기묘사화(1519년)로 사림의 세력이 한풀 꺾인 시점이었던 것을 고려하면 그의 발언이 당시로서는 얼마나 과감한 것이었는가를 짐작할 수가 있을 것이다.
○ 바람을 피우고 그 사실까지 기록으로 남겼다.
이문건은 그의 나이 7살 때인 1501년 그의 아버지 이윤탁을 여의었다. 그는 2남3녀 중 막내로 이윤탁이 세상을 떠났을 때는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아버지의 상장례는 그의 형들과 누나 중심으로 치러졌을 것이다. 그의 아버지 묘소는 선산인 양주 영동(塋洞)에 조성되었는데, 그 위치는 지금의 태·강릉(泰?康陵, 중종의 세 번째 비이자 명종의 모후인 문정왕후와 그의 아들 명종의 능) 자리이다.

〈1536년 2월 30일〉 맑았다가 흐려졌다.
그러나 역사학과 미술사학 등 관련분야 대표 전문가들이 참여하고 있던 시 문화재위원회는 1차 심의(1990. 5. 13)에서 우리나라 역사상 유일한 한글고비를 다른 곳, 그것도 서울이 아닌 경기도로 이전하는 것에 전원이 반대했다. 동일한 사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안건은 그 이후로 반 년, 혹은 일 년 간격으로 문화재위원회 심의에 지속적으로 상정되었다. 문화재위원회의 입장은 완강했다.
문화재 보존·관리의 대원칙인 원형보존원칙에 충실한 것이었으나 그 어느 쪽도 만족시키지 못한 문화재위원회의 의결이었음에도 잠시 우회도로 개설이 추진되기도 했다. 문화재위원회의 의결대로 건설부 고시 제145호(1994. 4. 27)로써 우회도로 개설이 승인되었고 같은 해 8월 우회도로 공사가 착공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주민들은 대통령비서실, 감사원, 건설부, 서울시, 대한주택공사 등에 집단으로 항의서한을 제출하는 등 이에 반발했다. 


그리하여 묘 이전 완료를 최종 보고하고 그에 따른 보호구역 지정 검토를 위한 문화재위원회 11차 회의(1999. 6. 25)가 열렸다. 마지막 회의였다. 이 회의에서는 이전된 한글고비를 중심으로 문화재보호구역이 새로이 설정되었고, 이전된 묘의 둘레에 설치한 호석(護石)이 일반 사대부의 묘역에는 설치될 수 없는 것이므로 호석을 그대로 방치할 경우 훗날 사람들에게 일반사대부 묘에도 호석을 둘렀다는 오해를 줄 소지가 있다하여 이미 설치된 호석 철거를 명하였다. 그리고 지금은 인도가 되어버린 원래 묘 자리에 이 묘가 언제, 어떠한 경위로, 얼마만큼 이동하게 되었는지를 상세히 기록한 지석(誌石)을 묻어 후세 사람들이 이 사실을 영원히 알 수 있도록 하였다. 부득이하게 이전허가를 내주었지만 문화재위원회는 이 문화재가 아무렇게나 옮겨지지 않도록 끝까지 최선을 다했던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