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 光山人 梅園 金光繼의 墓誌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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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영 작성일07-11-01 23:22 조회1,449회 댓글0건본문
매원(梅園) 김광계(金光繼: 1580 ∼ 1646)
자는 이지(以志)요 호는 매원(梅園)이다. 아버지는 근시재(近始齋) 해(垓)이고, 어머니는 진성(眞城) 이씨(李氏)로 퇴계 선생의 조카인 재(宰)의 따님이다.
선조 13년(1580) 8월 예안 오천에서 태어나 인조 24년(1646)에 향년 64세로 몰하였다. 8세에「소학(小學)]을 배됐으며 14세에 양친을 여의고 슬퍼하며 예로써 상을 치름이 마치 성인과 같았다.
처음 대암(大菴) 박성(朴惺)에게 배우다가 안동부사로 부임한 정한강(鄭寒岡)에게 심경(心經) 등을 물어 학문이 크게 성취했다. 광해군 때에는 세상이 크게 어지러워 문을 닫고 학문을 닦으며 심성을 기르기에 전념했으며 인조반정(仁祖反正) 이후에도 출세 영달을 탐탁히 여기지 않아서, 낙동강 언덕의 수석(水石)이 아름다운 한 절벽인 낙천(洛川) 위에 침낙정(枕洛亭)을 지어 글을 읽고 거닐며 후진을 가르침을 즐거움으로 삼았다.
경상감사 김시양(金時讓)이 나라에 천거하여 동몽교관(童蒙敎官)·재낭(齋郎)· 별검(別檢) 등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감사(監司) 이경여(李敬輿) 같은 이도 좀처럼 남을 칭허(稱許)하지 않는 성미였지만 공을 한번 대하고는 절로 경복(敬服)하여, 일찍 여러 고을 선비들에게 심경(心經), 사서(四書)를 강의하도록 도내(道
內) 도훈장(都訓長)을 삼으려 했으나 나아가지 않았으며, 모든 공무를 띤 사절(使節)로 공의 마을 부근을 지나는 인사들은 다들 공을 방문하여 예경(禮敬)을 표했다고 한다.
공의 학문은 실천궁행(實踐躬行)에 전심(專心)하여 외물(外物)에 구애됨이 없었으며, 혼자 있을 때에 더욱 두터운 공경으로 처했고 아무리 번잡하고 어지러운 가운데서도 한결같이 종용하고 침착함을 잃지 않았다 한다.
일찍 수암(修巖) 류진(柳袗)과 학문을 논하면서 [지(知)와 행(行)은 새의 양쪽 날개며 수레의 두 바퀴와 같아서 양편 모두 겸비하도록 힘써야 하겠지만 마땅히 행(行)을 주로 삼아야 한다]고 했다.
학문에 있어서 공의 독특하고 오묘한 경지를 다른 사람들은 헤아리기도 어려울 정도이지만, 우복(愚伏) 선생(鄭經世)· 여헌(旅軒) 선생(張顯光) 등 당대의 석학들도 모두 공의 해박(該博)하고 깊은 경지를 찬탄하여 마지않았다 하며 공의 서재밖에는 원근에서 책을 끼고 몰려드는 학자들로 항상 문전에 신발이 가득하였다고 한다.
인조 5년(1627) 정월 정묘호난에 여헌(旅軒) 선생이 징문(徵文)을 보내어 공으로 의병장(義兵將)을 삼아 막 군사를 일으켜 출진하였으나 난리가 평정되어 곧 파했으며 동 14년, 또 병자호란(丙子胡亂)을 당하여 공은 다시 의병을 일으켜 서울을 향해 행군하여 막 기천(基川: 지금 풍기)을 지나 죽령을 넘어서다가 나라에서 강복했다는 비보(悲報)를 듣고 북향 통곡하고 군사를 해산했음이 공의 일기인「 매원일기(梅園日記)] 속에 적혀 있어 후학들의 사료(史料)로 참고가 되고 있다.
그가 졸하자 대사간(大司諫)인 학사(鶴沙) 김응조(金應祖)가 묘지(墓誌)를 짓고 공조판서 이가환(李家煥)이 묘갈명(墓碣銘)을 지었다.
『매원유고(梅園遺稿)』 4책과 「매원일기(梅園日記)』가 전한다. 구 밖에 분재문기(分財文記)· 호구단자(戶口單子)·입양문기(入養文記)·소지(訴志)·교지(敎旨) 등이 현재 대종택에 보존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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