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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61(공민왕10)∼1438(세종20)
문온공(휘 九容)의 아들이다. 15세에 진사급제하고, 부친(척약재 휘 구용)께서 명나라에 행례사(行禮使)로 갔다가 귀양길에 돌아가시자 슬픈 상중에서도 생원과에 급제함. 그 후 낭장, 중랑장. 사헌부 감찰, 호조좌랑, 사헌부 지평, 호조정랑 등을 역임하고 , 진양대도호부 판관, 옥주군사. 경창부 소윤. 성천도호부사 등을 거침. 만년에 경기도 광주의 탄곡리에 퇴거하여 사심.
지난 1989년 경, 공의 묘를 경기도 광주읍 목리에서 포천군 창수면 가양리의 선친 묘역으로 이장할 때, 분묘 속에서 분청상감으로된 원통형의 묘지(아래 사진)가 발견되었는데, 음각으로 묘지 내용이 아름답게 새겨져 있었다. 제작연대는 1439년(正統四年이라 새겨짐. 세종 21년)이며, 제작기법이나 상감기법, 제작연대, 글씨나 형태, 온전한 보존 상태 등으로 보아 우리나라 도자기사에 중요한 사료로 보인다. 국가 문화재 또는 보물로 지정될 가치가 충분히 있는 귀중한 우리 문중의 유물이다. <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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