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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金鐵原(확)正卿輓詞 / 김철원(수령) 정경 김확 만사-이안눌 작> (2003. 10. 27. 태영(군) 제공) 一世生聯甲 / 한 시대에 나란히 태어나 相知六十年 / 서로 안 지 60년이 되었네. 誰言先白首 / 누가 알았으리 먼저 흰머리 되었으되 此日後黃泉 / 이날엔 황천에 늦게 갈줄을 天근公卿貴 / 하늘은 높은 공경에 인색하지만 (근:革斤) 人欽子姪賢 / 사람들은 아들과 조카 현명하다 존경하네. 豊田互愴別 / 풍전에서 서로 슬프게 이별했으되 高誼憶洪川 / 높은 우의 홍천 시절을 기억하네. <출전: 동악집(東岳集)>
이안눌 [ 李安訥 ]본관 덕수(德水). 자 자민(子敏). 호 동악(東岳). 시호 문혜(文惠). 1599년(선조 32)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형조 ·호조의 좌랑을 역임하고 예조좌랑이 되어 서장관(書狀官)으로 진하사 정광적(鄭光積)과 함께 명나라에 다녀왔다. 안동(安東)부사를 거쳐 1623년 인조반정 때 예조참판이 되었으나 나가지 않았고, 일찍이 특진관으로 있다가 조정의 일에 시비를 가려 극언하여 고관들의 미움을 사 사직했다. 청나라 사신이 사문(査問)하러 왔을 때 실언(失言)한 일로 인해 북변으로 귀양갔다. 정묘호란 때 용서받아 왕의 피란처인 강화부유수(江華府留守)가 되었다가 형조참판 ·함경도관찰사를 지내고 1632년(인조 10) 주청부사(奏請副使)로 명나라에 가서 인조의 아버지인 정원군(定遠君)의 추존을 허락받아 원종(元宗)이라는 시호를 받아왔다. 그 공으로 예조판서에 오르고 전장(田莊)을 상으로 받았다. 1636년 병자호란 때 왕을 남한산성에 호종하였다. 죽은 후 청백리에 녹선되고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시문에 뛰어나 이태백(李太白)에 비유되었고, 글씨도 잘 썼다. 문집에 《동악집》이 있다.
2) <국역 국조인물고>내의 기록 내용 (2004. 6. 1. 윤식(문) 제공) ▲출전 : 국역 국조인물고 제6집 182쪽~187쪽
묘지명(墓誌銘) 이민구(李敏求) 지음 나의 외숙 금사공(金沙公)이 꼿꼿하여 특이한 지조가 있고 학문을 넓고 크게 닦았으나 이름을 성취한 바가 없기에 내가 일찍이 조용히 말하기를, “외숙께서는 장년(長年)이 되었는데도 진취(進取)에 조금도 뜻이 없으니, 어떻게 후사를 열려고 합니까?”라고 하였다. 그때 공이 술자리에 있다가 돌아보며 말하기를, “어찌 너에게 묘지(墓誌)를 써 달라고 할 만큼 되지 않겠느냐?”라고 하기에 내가 불민(不敏)한 것을 사죄드렸다.
그 뒤에 외숙께서는 유과(儒科)를 통하여 벼슬길에 나가 지방의 고을을 역임하면서 혁혁(赫赫)하게 명성이 났었다. 그러나 이는 공에게 있어서 하찮은 것이었다. 공이 세상을 떠난 지 20여 년이 된 뒤에 늙어서 백수가 된 내가 비로소 잘하지 못한 글로 공의 은미한 말씀에 따라 묘지명을 쓰게 되었으니, 어찌 슬프지 않겠는가?
공의 휘(諱)는 확(矱)이고 자(字)는 정경(正卿)이다. 젊어서 하곡(荷谷) 허봉(許篈)의 문하에서 수업하고 나이 18세에 기축년(己丑年 1589년 선조 22년) 진사(進士) 시험에 합격하였다. 이윽고 임진왜란(壬辰倭亂)을 당하여 부모를 모시고 북쪽으로 피난갔었는데, 3년을 지나 갑오년(甲午年 1594년 선조 27년) 도사공[都事公 김대섭(金大涉)]이 세상을 떠나자 심 의인[沈宜人 청송 심씨(靑松沈氏)]이 스스로 따라 죽기로 맹세하고 15년을 하루같이 죽을 먹으면서 수없이 통곡하였다.
외숙께서는 허리띠를 풀지 않고 역시 15년을 하루같이 봉양하다가 상(喪)을 당하자 염습(殮襲)하는 것부터 관(棺)을 꾸미고 반장(返葬)하고 묘역(墓域)을 조성하고 제위답(祭位畓)을 비치하는 것에 이르기까지 게을리하지 않고 한결같이 정성껏 하였다.
이 때문에 과거를 보지 못하다가 무오년(戊午年 1618년 광해군 10년)에 비로소 과거에 급제하여 성균관(成均館)에 예속되어 광흥창 봉사(廣興倉奉事)를 겸임하였다. 광흥창의 관원이 으레 날마다 하급 관리에게 물건을 바치도록 하고 하급 관리는 이를 빙자해 사복을 채우거나 때로는 단점을 잡아 조종하기도 하였는데, 공이 잘못된 관행을 일체 개혁하였다.
임술년(壬戌年 1622년 광해군 14년)에 원수(元帥) 한 문익공[韓文翼公 한준겸(韓浚謙)]의 종사관(從事官)으로 부름을 받아 도착하여 보니, 강물이 얼어붙어 있었다. 정탐하는 사람이 보고하기를, “오랑캐의 장수가 의주(義州)를 대대적으로 공격할 것이다.” 하고 그 날짜를 말하니, 온 군영(軍營)이 벌벌 떨었으나 공은 가서 군사를 사열하겠다고 자청하였다.
공이 이미 떠났을 때 원수가 전령을 보내어 경솔하게 진군하지 말라고 하였으나 공은 돌아보지 않고 곧바로 나갔는데, 여러 성들의 군사가 이미 고을의 문을 출발하였다. 성가퀴를 지킨 사람이 말하기를, “종사공(從事公)은 문관(文官)이면서도 위험과 어려움을 무릅쓰고 있으니, 병사가 죽는 것은 직분이다.” 하였다. 공이 그곳에 5일간 머물러 있으면서 더욱더 차분하게 행동하면서 말하기를, “내가 만약 빨리 나가면 군사의 마음이 동요할 것이다.” 하였는데, 원수가 그 말을 듣고 공의 아량을 칭찬하면서 조정에 보고하였다.
계해년(癸亥年 1623년 인조 즉위년) 인조(仁祖)가 막 왕위에 올랐을 때 좨주(祭酒) 정엽(鄭曄) 공이 공을 추천하여 학무(學務)를 관장하도록 하였는데, 공이 말하기를, “이는 일 아닌 것이 없다.” 하고 방도에 따라 기획을 짜 허물어진 재실(齋室)을 모두 수리하고 명륜당(明倫堂) 동편 정록청(正錄廳)을 중건하는 등 시원하게 새로 단장하였는데, 그 공로로 병조 낭관(兵曹郎官)으로 승진하였다.
역적 이괄(李适)이 서울을 침범할 때 자전(慈殿)을 호위하고 한강(漢江)을 건너가 수레의 말이 부족하자, 공이 자신이 탄 말로 채워서 자전을 모시었다.
을축년(乙丑年 1625년 인조 3년)에 직강(直講), 사예(司藝), 사옹원 정(司饔院正)을 역임하고, 원주 목사(原州牧使)로 부임하여 자신의 몸에 있는 병을 제거하듯이 폐막을 통렬히 제거하고 강당을 수리하여 학교를 일으키는 등 온갖 일이 잘 거행되어 조정에 보고되자, 임금이 비단을 하사하였다. 1년간 있다가 관찰사(觀察使)의 비위에 거슬려 파직되어 돌아오자, 고을 사람들이 유임(留任)해 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회답이 없었다.
정묘년(丁卯年 1627년 인조 5년)에 호란(胡亂)이 일어나 문익공(文翼公)이 동궁(東宮)을 모시고 남하(南下)할 때 또 공을 종사관(從事官)으로 삼았으므로 서용되어 사옹원 정(司饔院正), 군자감 정(軍資監正)을 역임하였다.
그 이듬해에 순창 군수(淳昌郡守)로 부임하여 원주에 있을 때보다 정사를 더 주도 면밀하게 거행하였다. 그때 마침 흉년이 들었으나 곡식을 풀어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고 종자를 나누어 주어 농사를 권장하여 고을이 크게 다스려졌으니, 공 수형(龔水衡)만 유능한 관리가 아니었다. 가을에 관찰사와 친척이라는 혐의로 해임되었다.
전후 두 고을에 부임하여 모두 1년이 차지 않았으나 그 고을 사람들이 비석에 선정(善政)을 새기어 추모하였다. 공이 세상을 떠나자 순창의 백성들이 토산물(土産物)을 모아 부조를 하였고 일이 있어 서울에 온 그곳 백성들이 모두 찾아와 매우 슬프게 곡하였으니, 이게 어찌 미리 만나자고 약속한 것이겠는가?
기사년(己巳年 1629년 인조 7년)에 상의원 정(尙衣院正)으로 있다가 철원 부사(鐵原府使)로 나가 옛날의 소신대로 고을을 다스렸다. 임신년(壬申年 1632년 인조 10년)에 이르러 병환이 나 오래도록 낫지 않자 관찰사가 상황을 보고하면서 파직할 것을 요청하였으나 임금이 그의 치적(治積)을 애석하게 여기어 윤허하지 않았다. 계유년(癸酉年 1633년 인조 11년) 봄에 면직되었다가 결국 이 해 7월 7일에 세상을 떠나 영평(永平) 종현산(鍾顯山) 동쪽 산기슭 정좌(丁坐)의 묘원에 묻히었는데, 도사공(都事公)의 묘소가 바로 서쪽에 있다.
김씨(金氏)는 신라(新羅) 경순왕(敬順王)에게서 비롯되었는데, 그 뒤 상락공(上洛公) 김방경(金方慶)과 척약재(惕若齋) 김구용(金九容)이 저명하였고, 우리 조선조(朝鮮朝)로 들어와 직제학(直提學) 김맹헌(金孟獻), 첨정(僉正) 김자양(金自讓)이 6대조, 5대조이다.
고조 김예생(金禮生)은 청도 군수(淸道郡守)이고, 증조 김윤종(金胤宗)은 경상 병사(慶尙兵使)이고, 할아버지 김진기(金震紀)는 활인서 별제(活人署別提)이고, 아버지 김대섭(金大涉)은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이고, 어머니 청송 심씨(靑松沈氏)는 청성백(淸城伯) 심덕부(沈德符)의 후손이자 관찰사(觀察使) 심전(沈詮)의 딸이다.
공은 체격이 우람하고 기개가 위대하여 풍속에 따라 움직이지 않았고 사람을 접할 때 간격을 두지 않았으며 마땅히 해야 할 일을 만나면 머뭇거리며 관망하지 않았다. 이보다 앞서 허씨(許氏) 집안으로 출가한 누님이 죽어 북쪽 지방에 묻히었고 그의 1녀는 나이 겨우 4세였는데, 공이 몸소 수천 리를 달려가 그 남편(許宗)의 묘에다 반장(返葬)하고 그의 딸을 장성할 때까지 보살펴 출가시켰다.
다급한 사람이 있으면 기꺼이 도와 주면서 말하기를, “구마(狗馬)나 성색(聲色) 때문에 조상의 유산을 파한 자가 있지 않는가?”라고 하였다. <임진왜란 때> 총병(摠兵) 양원(楊元)이 남원(南原)에서 패배하여 사상자(死傷者)가 길에 가득하였으므로, 공이 수성(脩城)의 길 왼쪽에서 죽을 쑤어 구제하자 병사들이 모두 모여들었다.
평소에 손님이 오면 반드시 주식(酒食)을 차려놓고 날마다 마시며 즐기었으므로 한가롭게 노니는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동음현(洞陰縣) 하류의 물가에다 집을 지었는데, 선산(先山)과 가까웠으므로 노닐면서 차마 떠나지 못하였다.
병조(兵曹)에 있을 때는 대간(臺諫)이 ‘낭관이 사람을 잘못 추천하였다.’고 탄핵하였으나 추천을 주관한 사람이 머뭇거리며 사실대로 말하지 않자, 공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나도 같이 참석하였으니, 차라니 내가 말하겠다.” 하고 이내 실토하여 파직되었는데, 사람들이 장후(長厚)한 기풍에 감복하엿다.
원주(原州)에 있을 때는 하급 관리가 법을 범하여 처벌을 받자 그의 아비가 노하여 말하기를, “상관이 그러한데 네가 신명(神明)을 속이려고 하였으니 그 죄가 하나이고, 나쁜 짓을 하여 형벌을 받아 내가 물려준 신체를 훼손하였으니 그 죄가 둘이고, 사람들이 앞으로 어떤 관리의 아들이 관청에 죄를 지었다고 하면 내가 향리의 사람을 보기가 부끄러울 것이니 그 죄사 셋이다.” 하고, 향리의 사람들을 모아놓고 그의 아들에게 곤장을 쳤는데, 세상 사람들이 그를 오우[吳祐 후한(後漢) 순제(順帝) 때 사람]에게 비유하였다고 한다.
아! 외숙께선 일찍부터 초야의 현인(賢人)들과 노닐어 성대한 명망이 있었다. 자신을 다스릴 때 명절(名節)로 가다듬고 정사를 시행할 때 착한 교화로 사람을 이끄는 등 자신을 다스리거나 사람을 다스릴 때 시행한 바가 적절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러나 기회가 많지 않아 백분의 일도 시험해 보지 않았다. 세상은 생명을 내놓고 부귀를 탐하여 아부하면서 빌붙고 있는데, 공의 발자국은 세도가의 문전을 밟아 보지 않았고, 공의 이름은 권력자의 입에 오르지도 않은 채 뒤에서 조용히 살다가 침체된 대로 세상을 떠났으니, 세상에 그 누가 트집을 잡을 수 있겠는가?
부인 동래 정씨(東萊鄭氏)는 우의정(右議政) 정언신(鄭彦信)의 딸인데, 씩씩하고 아름다우며 차분한 데다 말이 적고 행실이 간결하여 대문을 나서지 않았고 창문을 통해 엿보지 않는 등 시집가기 전부터 이미 그러하였다. 친척이 초청하면 반드시 일을 들어 못 가는 이유를 해명하였고 나이가 많아서도 여전하였다.
의정공(議政公)의 조복(朝服)이 해어지자 밤에 등불을 켜 놓고 손수 새 옷을 만들기 시작하여 동이 트기 전에 완성하니, 의정공이 그의 민첩한 솜씨에 감탄하였다.
공에게 시집와서 부모를 섬길 때처럼 시부모를 섬기니, 시부모가 그의 봉양에 만족하였다. 나의 형제와 부인의 여러 조카들이 날마다 앞에서 모시고 놀았는데, 어느 날이나 해가 지도록 길쌈을 손에서 놓은 적이 없었고, 밖에 나가 보면 손님이 자리에 가득 하였으나 하루도 술과 고기가 술동이와 도마에 있지 않은 적이 없었다. 이는 의정공의 성품이 손님을 좋아하여 평소 술상을 차리는 일을 부인이 맡았었기 때문에 가르침을 익힌 것이었다.
새벽에 일어나 가사(家事)를 다스리면 노비들이 시키는 대로 일을 하였는데, 부리는 데 방법이 있었고 살림살이에 제도가 있었다. 처음에 공은 대대로 선비로 내려와서 가산(家産)이 그리 풍족하지 않았으나 가세(家勢)가 성립되어 향리에서 부호(富豪)로 일컬어진 것은 부인이 살림을 잘하였기 때문이었다.
큰오라버니 대사헌공[大司憲公 정협(鄭協)]은 첩실(妾室)이 집안 살림을 하고 있었는데, 의정공의 기일(忌日)을 만날 때마다 제물(祭物)을 장만하여 주면서 말하기를, “어찌 나의 어버이로 하여금 복첩(僕妾)이 지내는 제사를 흠향하게 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여동생이 가난하여 조석(朝夕)거리를 대주었으나 여전히 그의 자녀들을 데리고 있었으며 서제(庶弟)의 딸들도 모두 양육하여 출가(出嫁)를 시키었는데, 이는 부인에게 있어서 자잘한 일이었다.
신미년(辛未年 1631년 인조 9년) 6월에 향년 64세로 세상을 떠나 공의 곁에 묻히었다. 1남 5녀를 두었다. 아들은 생원(生員) 김정지(金鼎之)이고 김정지도 1남 김환(金奐)을 두었다. 딸은 현감(縣監) 오정주(吳挺柱), 사인(士人) 송지헌(宋之獻), 이성익(李成翼), 서문도(徐文道), 홍억(洪億)에게 시집갔다. 다음과 같이 명(銘)을 쓴다. 공이 일찍이 때를 만났더라면 장년에 여유롭게 조정에서 일을 하였을 것이고, 공이 만년에 합치되었더라면 부지런히 원로로서 전형(典刑)이 되었을 것이다.
젊어서는 과거에 침체되었고 만년에는 문서에 시달렸도다. 얻어도 불우한 것은 사람 아닌 하늘 때문이었고 잃었던 이유는 내 아닌 시대 때문이도다. 자신이 보답을 받아 넉넉히 거두었다면 어찌 자손이 번창한 것을 볼 수 있으랴?
3) 금사공과 주변인물들- 이수광, 허균, 김확 (1) 이수광(李?光) 1563(명종 18)∼1628(인조 6). 조선 중기의 유학자·문학자.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윤경(潤卿), 호는 지봉(芝峯).
(2) 허균(許筠) 1569(선조 2)∼1618(광해군 10).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양천(陽川). 자는 단보(端甫), 호는 교산(蛟山)·학산(鶴山)·성소(惺所)·백월거사(白月居士).
(3) 김확(金?) 1572(선조 5)∼1653(효종 4).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 자는 정경(正卿), 호는 금사(金沙). 아버지는 도사 대섭(大涉)이다.
김확 선조님은 1572(선조 5)에 태어나신 조선 중기의 문신이십니다. 안동김씨 문온공의9세손이시며 자는 정경(正卿), 호는 금사(金沙). 아버지는 의금부도사 대섭(大涉)이시며, 어버니는 이조판서 청파군 심전의 따님이다. 두명의 누님이 태어난 후 막내로 태어나시어 어려서 집안과 교류가 깊었던 초당 허엽의 아들 하곡 허봉에게서 공부를 하시었습니다. 후에 작은누님이 허봉의 동생 허균에게시집을 가게 되었습니다. 큰 누님은 지봉유설의 저자 지봉 이수광에게 출가하셨다.
허봉에게서 열심히 공부하여 1589년 사마시에 합격, 진사가 되시었으나, 아버님의 급서의 충격으로 과거를 포기하였다가 늦게 1618년(광해군 10)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시었습니다. 그후 철원부사(鐵原府使)를 지내시고 상의원정으로 치사하시었다. 일찍이 하곡(荷谷) 허봉(許봉)에게 수학하여, 문장이 뛰어나 사림들 사이에 명성이 높았다고 어려 곳에 기록 되어 있다.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 때 병조정랑(兵郎)으로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호위하여 한강을 건넜으며, 1627년 정묘호란 때는 동궁을 배위(陪衛)하여 남행(南行)하는 등 국가의 비상시에 왕실의 안위를 담당한 바 있다고 역사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1653(효종 4). 에 돌아가셨습니다. 묘지명은 생질(큰누님+지봉 이수광)인 판서 이민구가 지었습니다. 이민구의 형은 영의정을 지낸 이성구이다.
허균의 첫번째 부인은 안동김씨이다. 정부인 안동김씨는 문온공의 종손인 김대섭의 막내딸로서 허균에게 시집가서 딸 하나와 아들 하나는 낳고 임진왜란때 죽었다. 이때 아들도 또한 죽었다. 다만 딸만 성장하여 이사성에게 시집가서 아들을 낳으니 이 아들(허군+안동김씨의 외손자)이 허균의 문집을 보관하여 후세에 전했다. 특히 오늘날 홍길동전이 전해질수 있었던 것은 교산의 첫부인(김대섭의 딸)의 외동딸이 몰래 감추어서 전해진 것으로, 국문학사의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
* 永平金水潭 一名牛頭淵 山水之承 甲於畿內 舊有金胤福者居之 胤福平生喜彈琴 號琴翁 楊蓬萊士彦 刻詩巖石曰--- <이수광, 지봉유설, 13;25b>
‘양봉래 선생의 아량과 풍도는 세상의 숭상받는 바가 되거니와 나의 선친(초당 허엽)과 사마(司馬)·문과(文科)를 모두 같이 합격하였으므로 그 사귐이 가장 친밀한데, 문장이 높고 빼어나 구름을 앞지를듯한 기상이 있고, 행서(行書)·초서(草書)를 잘 쓰는데 그 쓰는 법이 마치 용이나 뱀처럼 분방하며, 본성이 벼슬살이를 우습게 알고 산수(山水)에 정을 붙여 짚신과 밀로 결은 나막신 차림으로 어느 때고 가지 않은 날이 없었다.’〔허균「성소부부고」부록1 학산 초담〕 ‘안변부사에 있을 때는 공무를 제쳐두고 10일 이상씩 산수(山水)에 들어간 적도 있었다.’〔이수광(李?光)「지봉유설(芝蓬類說)」〕
4) 금사공과 주변 인물들-- 이민구, 신익성, 허목
(1) 이민구(李敏求) 1589(선조 22)∼1670(현종 11).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자시(子時), 호는 동주(東洲)·관해(觀海). 이조판서 수광(?光)의 차남이다. 철운부사공(휘 확)의 묘지명을 썼다. 동주집에 있다.
(2) 신익성(申翊聖) 1588(선조 21)∼1644(인조 22). 조선 중기의 문신. 병자호란 때의 척화5신(斥和五臣)의 한 사람.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군석(君奭), 호는 낙전당(樂全堂)·동회거사(東淮居士). 영의정 흠(欽)의 아들이며, 선조의 부마(駙馬)이다. 신흠은 <의금부도사 김공 의인 심씨 합장 지명 병서> 를 찬하였다.
5) 철원 부사공(휘 확)의 모친(휘 대섭의 배위) 청송심씨 만사 (2005. 3. 9. 영윤(문). 2006. 1. 24 영환(문) 제공) 출전 : 선원유고 (仙源遺稿-김상용) 仙源遺稿下 七言長律 金확矱母氏挽 花樹開筵記昔時。 生平淑德慣聞知。 幽貞可作閨門範。 賢哲非徒酒食宜。 一世高風推絳帳。 十年孤影弔寒帷。 流光莫恨纔周甲。 蘭玉盈庭摠白眉
김상용(金尙容)1 1561(명종 16)∼1637(인조 15). 조선 인조 때의 상신(相臣)이며, 병자호란 때의 순절인(殉節人). 본관은 안동. 자는 경택(景擇), 호는 선원(仙源)·풍계(楓溪)·계옹(溪翁). 서울출신. 돈녕부도정(敦寧莩正) 극효(克孝)의 아들이며, 좌의정 상헌(尙憲)의 형, 좌의정 정유길(鄭惟吉)의 외손이다. 1582년(선조 15)진사가 되고 1590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부정자(承文院副正字)·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이 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강화 선원촌(江華仙源村:지금의 江華郡 仙源面 冷井里)으로 피난했다가 양호체찰사(兩湖體察使) 정철(鄭澈)의 종사관이 되어 왜군토벌과 명나라군사 접대에 공을 세움으로써 1598년 승지에 발탁되고, 그뒤 왕의 측근에서 전란중의 여러 사무를 보필하면서 성절사(聖節使)로서 명나라에 다녀왔다. 1601년 대사간이 되었으나 북인의 배척을 받아 정주목사로 출보(黜補), 이후 지방관을 전전하다가 1608년(광해군 즉위년) 잠시 한성우윤·도승지를 지낸 뒤 계속 한직에 머물렀다. 1617년 폐모론(廢母論)이 일어나자 이에 반대하여 벼슬을 버리고 원주로 거처를 옮겨 화를 피했다. 인조반정 뒤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에 기용되었고, 이어 병조·예조·이조의 판서를 역임하였으며, 정묘호란 때는 유도대장(留都大將)으로서 서울을 지켰다. 1630년(인조 8) 기로사(耆老社)에 들어가고 1632년 우의정에 발탁되었으나 늙음을 이유로 바로 사퇴하였으며, 1636년 병자호란 때 묘사주(廟社主)를 받들고 빈궁·원손을 수행하여 강화도에 피난하였다가 성이 함락되자 성의 남문루(南門樓)에 있던 화약에 불을 지르고 순절하였다. 일찍이 외할아버지인 정유길에게서 고문(古文)과 시를 배웠고, 성혼(成渾)과 이이(李珥)의 문인으로서 황신(黃愼)·이춘영(李春英)·이정구(李廷龜)·오윤겸(吳允謙)·신흠(申欽) 등과 친밀했으며, 당색이 다른 정경세(鄭經世)와는 도학으로써 사귀었다. 정치적으로 서인에 속하면서 인조초에 서인이 노서(老西)·소서(少西)로 갈리자 노서의 영수가 되었다. 시와 글씨에 뛰어났는데, 특히 서체는 2왕(二王:晉의 王羲之·王獻之 父子)의 필법을 본뜨고, 전(篆)은 중체(衆體)를 겸하였으며, 평양의 숭인전비(崇仁殿碑) 및 풍덕군수(豊德郡守) 장인정(張麟禎)의 비에 전액(篆額)을 남기고 있다. 시조로 〈오륜가 五倫歌〉 5장, 〈훈계자손가 訓戒子孫歌〉 9편이 전한다. 한때 그의 죽음을 놓고 자분(自焚)이 아니라 실화(失火)때문이라는 이설이 있었으나, 박동선(朴東善)·강석기(姜碩期)·신익성(申翊聖) 등의 변호로 정려문(旌閭門)이 세워지고, 1758년(영조 34)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강화 충렬사(忠烈祠), 양주 석실서원(石室書院), 정주 봉명서원(鳳鳴書院), 안변 옥동서원(玉洞書院), 상주 서산서원(西山書院), 정평 모현사(慕賢祠)에 제향되었다. 문집으로 《선원유고》 7권이 전하고, 판본은 안동 봉정사(鳳停寺)에 보관되어 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6) 금사공(휘 확)이 지은신 매부 지봉 이수광의 제문 (2005. 3. 18. 영윤(문) 제공) 芝峯先生集附錄卷之二 철원 부사공 김 확 선조님께서 상의원정 이실때 지으신 매부 지봉 이수광 제문 [祭文]尙衣院正金矱 066_335b
嗚呼。公之德行文章。一國知之。非但一國知之。安南琉球海外之國亦知之。則謂天下知之可也。其生也天下知之。其死也實天下慟也。夫我何敢私。嗚呼。弟年八歲。兄贅吾家。與之同爨者十年。異居而身未嘗離于左右又四十年。幼而提撕。長而薰陶。老而同其樂共其憂。敬若嚴師。視如同氣者終始五十年矣。今 ▶ 066_335c 其亡矣。吾將安恃。慟極高旻。淚徹厚地。長逝之前。哀何可已。嗚呼哀哉尙饗。
상의원정 김확 선조님의 아드님이 지으신 고모부 제문 [祭文] 生員金鼎之 066_335c
嗚呼。姪家三世。世無兄弟。視猶己子。公曁姑氏。旣哭姑氏。惟公之恃。夙宵函丈。親承警欬。千里江南。五載畿莊。逮歸京洛。益親門墻。世故多端。人事難常。我有南征。公在于堂。臨別賜言。勉以好歸。情由中發。語多悽悲。余今衰邁。疾病難期。風塵歲暮。傷此別離。惘惘出門。去留傷神。一言永訣。曾未爲然。訃傳湖外。夢也非眞。終天慟切。欲見無緣。我懷悠悠。曷云其極。始聞 ▶ 066_335d 公疾。母病彌篤。南鄕身遠。北望心結。疾未親藥。斂不憑棺。幽明負德。生死虧恩。有隕如瀉。無補我愆。嗚呼。藹藹如春。曄曄如星。典刑旣遠。禮樂云亡。非我哭私。聖主所傷。嗚呼慟哉尙饗。
7) 김생 정경(金生正卿)에게 준 글 (허균이 처남 부사공 김확에게 준 글) (2005. 6. 1. 영윤(문) 제공) 출전 : 성소부부고 제9권 . 문부 6 文部六 - 서 書
김생 정경(金生正卿)에게 준 글 (허균이 처남 부사공 김확에게 준 글) 문온공-명리-맹헌-자양-예생-윤종-진기-대섭-철원부사공 확 수서(手書)를 받아 얼굴을 보는 것 같은데, 더구나 위문이 지극하니 기쁨과 느꺼움이 한꺼번에 밀려오네. 관작은 외물(外物)이라, 한 번 배척받았다 해서 어찌 근심하겠는가.
내 평생에 유보(裕甫 이홍로(李弘老)의 자)로 인해 훼방을 당한 것이 심히 많았다. 지난번 호남으로부터 전주에 당도했을 적에 유보가 마침 모친의 상을 당해서 초상의 처사가 비록 대단히 미진했다 할지라도 외방(外方)에서 온 객이 어떻게 그 일을 알 수 있었겠는가. 유보를 욕하는 사람 가운데 어떤 이가 나를 끌어들여 증인으로 삼으려 하니, 사람들은 나를 보자마자 다투어 그 경위를 묻곤 하였네. 그러나 유보는 일찍이 내가 복중(服中)의 상제로서 행실에 근실치 못하다 하여 욕을 했던 적이 있으니, 그가 초상 중에 도장을 사용해서 관물을 도둑질해내고 하인을 마구 때린 따위의 일을 설사 내가 눈으로 보았다 한들 어찌 그것을 입에 담아 마치 보복하는 것처럼 할 수 있겠는가. 이 까닭에 묻는 사람이 백이 넘었으나 모두 잘 모른다고 답을 했었네. 이 때문에 의심이 나에게 미치게 되어 마침내 이르기를 '이제는 오히려 서로 결탁하여 모의하는 데 이르렀다.'고들 하니, 원통함이 이보다 심한 것이 어디 있겠는가. 양오(養吾 이지완(李志完)의 자)가 이 말을 듣고 와서 말을 하니, 내 자신에 있어서는 애당초 이런 일이 없었던 바라 내 입으로 변론해 두려는 것이네.
유보가 기(奇)ㆍ송(宋) 두 집안에 다그쳐 물은 것도 어찌 또한 내가 친하여 그런 것이겠는가. 미움을 받게 된 발단이 진실로 이에서 나온 것이네. 그 후에 형님댁에서 대내(大內)와 혼인을 맺을 때 천례(賤隷) 수인이 유보의 명을 받아 총재를 위에다 이간질하기 위해 언서(諺書)를 조작해서 귀인들을 얽어매자 드디어 분요의 발단이 일어나게 되었으니, 그 의심을 부른 것은 진실로 당연한 일이네. 오늘날 사대부의 인가(姻家)에서도 신부의 계부(季父)가 감히 언어로써 그 시어머니에게 통할 수는 없는 터인데, 하물며 궁궐 속의 엄하고 깊은 곳에서 어찌 그리한단 말인가. 오래 있으면 저절로 밝혀질 것이기에 변명하지 않으려 했던 것이었네.
나는 본디 벼슬의 영달을 좋아하지 않았는데, 이제 한 사단을 얻어 절로 파직하게 되었으니, 가을 비가 잠깐 걷히면, 마땅히 한 필 말을 타고 자네 집을 찾아 보고 인하여 동쪽으로 돌아갈 계획을 세웠네. 이 때쯤 자네가 만약 별장에 있으면 지나는 길에 며칠을 묵으면서 고금을 극담키로 하세. 단지에 남은 단술로는 술 못하는 손을 대접할 수 있겠고, 석순(石筍)과 자라로는 술상 안주로 족할 것이니, 모름지기 바람 난간을 치우고 기다리게. 끝내 약속을 저버리지 않을 것일세. 이만 그치네.
위의 편지를 보낸후 영평 별장에 도착하여 다음의 편지를 쓴것이 아닌가 합니다
석주(石洲)에게 준 글 서울에 있을 적에 형이 강도(江都)에서 보낸 편지를 받아보니, 나의 벼슬 잃음을 위로한 말씀이었습니다. 이때 나는 이미 수레를 단속하여 도성문을 나오는 참이었는데, 찾아 온 사환이 편지를 놓고 떠나겠다 하기에 총망중이라 답장을 쓰지 못했으니, 우물쭈물 결례한 죄를 피할 길이 없습니다. 나는 집을 떠난 이틀 만에 김 정경(金正卿)의 영평(永平) 별장에 닿으니 천학(泉壑)과 계산(溪山)의 아름다움은 지난해에 못지 않았으나, 다만 한스러운 것은 대관(臺館)이 허물어진 것을 다시 세우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방안에 들어가니 단술이 항아리에 가득하여 향의(香蟻 술독에 뜬 쌀을 벌레에 비유한 것)가 한창 굼실거리니 형을 초치해다가 큰 술잔으로 권하지 못한 것이 한스러울 뿐이었습니다. 형이 이 말을 들으면 반드시 군침을 흘릴 것입니다. 지금에 이르러도 성벽에는 고죽(孤竹 최경창(崔慶昌)의 호)ㆍ하곡(荷谷 허봉(許篈)의 호)의 시가 남아 있어 청초하여 읊을 만했고 또 자민(子敏 이안눌(李安訥)의 자)의 시가 있었으나 바빠서 화운을 하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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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금사공의 <지봉 이수광 만사> (2005. 3. 18. 영윤(문) 제공)
芝峯挽詞 [挽詞]尙衣院正金矱(확)] 父兄師友義兼俱 敬愛何曾骨肉殊 道德日加新學力 文章餘事舊工夫 平生較量巵觴健 亂世相携雪嶺孤 十五年前哭제淚 (제=女+弟) 지今重灑但悲呼。(지=禾+氏)
9) 지봉 이수광이 지은 정부인 김씨(휘 大燮의 女)의 묘지명 (2006. 2. 10. 영환(문) 제공)
亡室貞夫人金氏墓誌銘 지봉 이수광 夫人天資秀懿。稟性端莊。聰明過人。敏達事理。立心制行。一出於正。數歲時父母他出。乳婢私取果子與喫。則却之曰。此偸竊之物。吾不欲也。多方勸誘。終不肯。其雅性然也。十三。歸于我。入門拜舅姑。儀度夙成。不待姆敎。自能中禮。觀者歎異之。蓋自幼。考都事公訓誨甚至。於孝敬二字。素所習聞。故常曰。我之粗識066_235d婦道。乃家大人敎導之致也。平居溫恭謹飭。和敬備至。而無一言違忤。無一事矯飾。明析是非。唯恐不當於義。無纖毫苟簡底意。有士君子所不能及者。奉祭祀極其誠敬。先期齋沐。手自具膳。裁折之餘。必皆謹藏。懼其褻瀆。終夜不寐以待行事。不爲隆寒疾恙少懈。事我先妣。承順致孝。略無違志。壬辰之亂。余以從事官赴嶺南。逮京城失守。無他子弟。姊兄欲奉先妣以出。夫人執不可。獨從先妣携諸稚弱。深入北道。備嘗危險而卒得全。方變故倉卒之際。非眞知義理輕重。何以辦此。其在流離竄伏中。尤能扶持供養。出於066_236a至誠。不避死生。以安親心。先妣每稱曰。吾賢婦也。臨終猶諄諄口中曰。吾婦孝養之誠。終不能報。是爲恨耳。及喪。哀禮竝盡。屬時飢饉。營葬無路。罄其身上衣資。備辦送終。無絲髮憾。曁都事公之喪亦如之。其處變之智。奉親之孝。求之女史。古亦罕焉。待姻族隣里。曲有禮意。濟其貧乏。雖重貨不惜。與人和厚少言。絶無凌忽昵狎之色。其所欲爲。方便指畫。使得成就。故人皆敬慕親戴。必曰吾夫人吾夫人。余寡姊與庶從妹同居一家。待之盡誠。終始無間言。愛育二甥之孤者無異親子。以至婚娶。二甥亦視之如慈母。訓子女066_236b以嚴。隨事警飭。不令惰慢。居常雖甚愛。及小有過。必加峻責曰。常見婦人知愛而不知敎。以成其子之惡者多矣。吾不取也。俗尙禱祀。每嫉之曰。此非正理。有害無益。巫覡妖邪之言。一切不入於耳。且不喜芬華。親戚家請會。未嘗一往曰。女子之道。不宜出外。況燕樂乎。唯通問饋遺而已。勤於女工。以身爲率。未明早起。先令內外灑掃室庭。各執所事。日有常課。朝夕饌羞。家事大小。皆自檢察。未嘗頃刻暇逸。余止之則。曰我自樂此。不爲病也。志行高潔。聞人不善。或見事不正。如惡惡臭。語涉干請者。輒斥乃已。故人不敢私謁。066_236c亦未嘗求丐於人。年未三十。卽膺封爵。而不自貴重。常以安貧守分爲心。雖在州府。廚供猶不煩官。專責衙僕曰。是亦過矣。御臧穫편001有法。未嘗呵楚。而閨門肅穆。人自畏愼。又善體下情。均其勞逸。衣服飮食。莫不平等。疾病則加護。故咸得其歡心。卒後婢使有持 訖五年不變者數人。其德化之所感如此。余性拙。不顧生業。而善自料理。未嘗告乏。余又病欲求退。則輒曰。若決退則我能治農以供粥食。無甚難矣。每以此相勉而不克果。迄今有餘恨焉。旣屢經重喪。積毀成疾。而性篤慈愛。遇女夫妻俱歿。有七孤兒。日置眼前066_236d哭泣。由是疾遂亟。乃曰喪息以後。不能抑情至此。悔無及已。悉呼孤孫。泣言吾死矣。誰當恤養汝者。餘無一語以終。生於隆慶丁卯三月辛巳。卒以萬曆乙卯十月丙午。得年四十九。用其年十二月甲寅。葬于楊州長興里巽坐乾向之原。先卜也。金氏系出安東。爲新羅敬順王之後。考義禁莩事某(대섭)。祖禁火司別提某(진기)。曾祖節度使胤宗。妣靑松沈氏。觀察使銓之女。凡擧三男一女。男長聖求。議政府舍人。次義賢。幼夭。次敏求。弘文館副應敎。女適承文院正字權儆。先歿。聖求生二男二女。敏求生二男三女。皆幼。權儆生三男066_237a四女。男曰躋,蹟,趾。女適某某。餘幼。噫。以夫人之淑德至行如是。而天不與年。福不永享。亦命也。銘曰。 侍尊章從以子。魂不孤尙寧止。死則同此其志。
10) <손곡시집>과 <지봉유설>에서 (2007. 5. 9. 영환(문) 제공)
(1) 『蓀谷詩集』(李達)권2, 오언율, 「次韻呈金沙」 京洛幾年別 今來千里遊 天涯長作客 關外又逢秋 落葉飛前浦 斜陽下晩洲 流離且貧病 獨立萬端憂
(2) 『芝峯先生集』(李晬光)권4, 칠언율시,
「次金正卿送韓體察[益之]韻」 雙旌初下五雲間 威壓扶桑左海安 邊月曉隨丞相府 福星春動使臣鞍 淸風攬轡曾千里 壯志封關只一丸 此去姓名寒賊膽 更從燕石上頭刊 公曾任嶺南方伯
[故第三聯云爾]
『芝峯先生集』권4, 칠언율시, 「 丁未重九日 金正卿第醉話 席上口占」 杜門驚却歲時忙 愁裏佳辰強擧觴 紅葉庭除新過雨 黃花院宇早迎霜 西風敗我登高興 世事何心落帽狂 邂逅莫辭今日醉 餘生能得幾重陽
『芝峯先生集』권18, 昇平錄[昇平 順天別名 起丙辰九月 止己未三月] 「別金正卿還洛」 樽酒天涯一夢間 客懷無限送君還 喚仙亭上梅花月 留作他時別後顏
*이달(李達) 1539(중종 34)∼1612(광해군 4). 조선 중기의 시인. 본관은 신평(新平). 자는 익지(益之), 호는 손곡(蓀谷)·서담(西潭)·동리(東里). 영종첨사 수함(秀咸)의 아들이나, 홍주의 관기(官妓)에게서 태어났으므로 서자로 자랐다. 제자 허균(許筠)이 그의 전기 〈손곡산인전 蓀谷山人傳〉을 지으면서 “손곡산인 이달의 자는 익지이니, 쌍매당 이첨(李詹)의 후손이다.”라고 밝혀 놓았다. 원주 손곡에 묻혀 살았기에 호를 손곡이라고 하였다. 처음에는 당시 유행에 따라 송시(宋詩)를 배우다가, 정사룡(鄭士龍)으로부터 두보(杜甫)의 시를 배웠다. 박순(朴淳)이 그에게 시를 가르치다가 “시도(詩道)는 마땅히 당시(唐詩)로써 으뜸을 삼아야 한다. 소식(蘇軾)이 비록 호방하기는 하지만, 벌써 이류로 떨어진 것이다.”라고 충고하면서, 이백(李白)의 악부(樂府)·가(歌)·음(吟)과 왕유(王維)·맹호연(孟浩然)의 근체시(近體詩)를 보여주었다. 그는 시도가 여기에 있음을 깨닫고, 손곡의 집으로 돌아와 당시를 익혔다. 《이태백집》과 성당십이가(盛唐十二家)의 글, 유우석(劉禹錫)과 위응물(韋應物)의 시, 양백겸(楊伯謙)의 《당음 唐音》 등을 외웠다. 이렇게 5년 동안 계속 당시를 배운 뒤에는 그의 시가 예전과 달라졌다. 한편, 시풍이 비슷한 최경창(崔慶昌)·백광훈(白光勳)과 어울려 시사(詩社)를 맺어, 문단에서는 이들을 삼당시인(三唐詩人)이라고 불렀다. 이들은 봉은사를 중심으로 하여 여러 지방을 찾아다니며 시를 지었는데, 주로 전라도 지방에서 많이 모였다. 임제(林悌)·허봉·양대박(梁大樸)·고경명(高敬命) 등과도 자주 어울려 시를 지었다. 서자였기 때문에 일찍부터 문과에 응시할 생각을 포기하였지만, 다른 서얼들처럼 잡과(雜科)에 응시하여 기술직으로 나가지도 않았다. 특별한 직업을 가지지도 않았고, 온 나라 안을 떠돌아다니면서 시를 지었다. 그러나 성격이 자유분방하여 세상사람들에게 소외당하였다. 한때 한리학관(漢吏學官)이 되었지만,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 생겨서 벼슬을 버리고 떠났다. 중국 사신을 맞는 접빈사의 종사관으로 일하기도 하였다. 그의 시는 신분제한에서 생기는 한(恨)과 애상(哀傷)을 기본정조로 하면서도, 따뜻하게 무르녹았다. 근체시 가운데서도 절구(絶句)가 뛰어났다. 김만중(金萬重)은 《서포만필》에서 조선 시대의 오언절구 가운데 대표작으로 그가 지은 〈별이예장 別李禮長〉을 꼽았다. 허균은 〈손곡산인전〉에서, “그의 시는 맑고도 새로웠고, 아담하고도 고왔다(淸新雅麗). 그 가운데 높이 이른 시는 왕유·맹호연·고적(高適)·잠삼(岑參) 등의 경지에 드나들면서, 유우석·전기(錢起)의 풍운을 잃지 않았다. 신라·고려 때부터 당나라의 시를 배운 이들이 모두 그를 따르지 못하였다.”고 평하였다. 그는 일흔이 넘도록 자식도 없이 평양 여관에 얹혀 살다가 죽었다. 무덤은 전해오지 않으며, 충청남도 홍성군 홍성군청 앞과 강원도 원주시 부론면 손곡리 손곡국민학교 입구에 시비(詩碑)가 세워져 있다. 시집으로 제자 허균이 엮은 《손곡집》(6권 1책)이 있다. 이밖에 최경창의 외당질 유형(柳珩)이 엮은 《서담집 西潭集》이 있었으나 현재 확인되지 않고, 1623년 이수광(李睟光)이 지어준 서문만이 전한다.
*이수광(李睟光) 1563(명종 18)∼1628(인조 6). 조선 중기의 유학자·문학자.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윤경(潤卿), 호는 지봉(芝峯).
1. 가계 아버지는 병조판서였던 희검(希儉)이며, 어머니는 문화유씨(文化柳氏)이다. 부인은 안동김씨 김대섭의 딸이다. 16세 때 초시에 합격하였고, 17세에 아버지를 여의었다
2. 관직 20세에 진사가 되었고, 1585년(선조 18)23세에 승문원부정자가 되었으며, 27세에 성균관전적을 거쳐 그 이듬해에는 호조와 병조의 좌랑을 지냈고, 성절사(聖節使)의 서장관으로 명나라를 다녀왔다. 30세 되던 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경상도방어사 조경(趙儆)의 종사관이 되어 종군하였으나, 아군의 패배 소식을 듣고 의주로 돌아가 북도선유어사(北道宣諭御史)가 되어 함경도지방의 선무활동에 공을 세웠다. 1597년 35세에 성균관대사성이 되었는데, 그해 정유재란이 일어나고 또 명나라 서울에서 중극전(中極殿)과 건극전(建極殿) 등 궁전이 불타게 되자 그는 진위사(陳慰使)로서 두번째 명나라를 다녀왔다. 이때 명나라 서울에서 안남(安南:베트남)의 사신을 만나 화답하면서 교유하였던 사실이 주목된다. 39세에 부제학으로 《고경주역 古經周易》을 교정하였고 그 이듬해 《주역언해》를 교정하였으며, 41세에는 《사기》를 교정하였다. 1605년 43세에 조정 관료들과 뜻이 맞지 않아 안변부사로 나갔다가, 이듬해 병으로 사직하고 돌아와 1607년 겨울 다시 홍주목사로 부임하였다가 1609년(광해군 1)돌아왔다. 1611년 왕세자의 관복(冠服)을 주청하는 사절의 부사로 세번째 명나라을 다녀왔다. 이때에 유구(琉球)사신과 섬라(暹羅:타이)사신을 만나 그들의 풍속을 듣고 기록하였다. 정국이 혼란하여지자 1616년 순천부사가 되어 지방관으로 나가 지방행정에 전념하였다. 57세에 임기를 마치고 돌아와서는 수원에 살면서 모든 관직을 사양하여 나아가지 않다가, 1623년 인조반정이 되자 도승지 겸 홍문관제학으로 임명되고 대사간·이조참판·공조참판을 역임하였다. 1625년 대사헌으로서 왕의 구언(求言)에 응하여 12조목에 걸친 〈조진무실차자 條陳懋實箚子〉를 올려 시무를 논하여 당시 가장 뛰어난 소장(疏章)이라는 평을 받았다. 1628년 7월 66세에 이조판서에 임명되었으나 그해 12월에 세상을 떠났다.
3. 사회상황 그는 일찍이 관직에 나아가 중요한 관직을 모두 지냈으며, 세차례나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던 일만으로 보아도 관료로서의 구실을 충분히 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그의 활동 시기에는 임진왜란과 정묘호란을 치르고, 광해군 때의 정치적 갈등과 인조 때의 이괄(李适)의 반란을 겪었던 어려웠던 정국에 살면서도 당쟁에 휩쓸리지 않았으며, 언제나 강직하면서도 온화한 입장을 지켜 그 시대의 성실하고 양식 있는 관료요 선비로서의 자세를 지켰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면모는, 사회적 변동기에 새로운 사상적 전개 방향을 탐색하고 개척한 학자로서의 구실에서 찾아볼 수 있다. 즉, 그는 조선사회가 전기에서 후기로 변화하는 과정에서 사회변화와 더불어 발생하게 될 실학파의 선구적 인물로, 사상사 내지 철학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가지는 것이다.
이수광이 두드러지게 활동하던 반세기 초기는 이미 16세기후반에 있어 이황(李滉)과 이이(李珥)로 정점을 이루는 성리학의 이론이 성숙되었던 다음 시대로서 김장생(金長生)·정구(鄭逑) 등에 의하여 예학(禮學)이 융성하게 일어났던 시기이다. 이와같이, 도학(道學)의 정통성은 확립되었지만 임진왜란의 충격 속에 사회질서의 변화가 진행되었을 때는, 사상적으로도 정통적 도학의 성리학적 관심에서 벗어난 새로운 요구가 대두되었던 시기이다. 그것은 곧 한백겸(韓百謙)의 《기전유제설 箕田遺制說》에서 보여준 실증적 고증에 의하여 고대의 전제(田制)에 있어서 주자의 견해도 추측에서 나온 것에 지나지 않음을 밝혔던 사실이나, 남언경(南彦經)·이요(李瑤) 등 양명학의 이론에 호의를 가지는 태도의 출현을 들 수 있다.
4. 사상성격 이때의 이수광의 사상적 성격을 분석하여 보면, 주자학을 존중하는 입장에 있으면서도 그 당시 주자학의 기본문제인 태극·이기·사단·칠정 등 성리학의 이론에 뛰어들지 않고, 심성(心性)의 존양(存養)에 치중하는 수양론적 문제를 학문적 중추문제로 삼고 있는 데 그 특징이 있다. 비록 성리학의 이론적 분석이나 논변은 조선 후기를 통하여 지속적으로 발전하였던 것은 사실이지만, 이수광은 이러한 전통적 성리학파의 입장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새로운 방향을 탐색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그의 철학적 기본문제가 심성의 이기론적 개념분석이 아니라 수양론적 실천방법의 탐색이라는 것은, 그만큼 그의 철학이 관념철학을 벗어나 실천철학적 성격을 지니는 것임을 말하여준다.
그의 저술 《지봉유설》 가운데 유도부(儒道部)에서, 학문·심학(心學)·과욕(寡慾)·초학(初學)·격언의 5항목으로 분류하고 있는 사실도 주자학에서 존중되는 도체(道體)의 문제나 성리학적 과제를 젖혀두고, 심성의 수양론적 관심 속에서 유학을 분류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는 〈조진무실차자〉에서 정치의 효과를 이루지 못하고 사회가 어지러워지는 것은 모두 부실한 병 때문이라 지적하였고, 모든 일을 처리하는 관건은 성(誠)에 있으며 성이 곧 실(實)임을 밝히고, 실심으로 실정(實政)을 행하고 실공(實功)으로 실효를 거둘 것을 주장하면서, 생각마다 모두 실하고 일마다 실할 것을 요구하는 무실(懋實)을 강조하였다. 그의 무실론은 구체적 현실의 성이면서 동시에 도덕적 성실성의 요구이다. 성을 모든 것에 일관하는 원리로 삼고, 이 성의 현실적 실현을 추구하는 것은 실학정신의 근원적 사유방법임을 확인할 수 있다.
또, 그는 학(學)은 활쏘기와 같아서 과녁을 지향하는 것이라 밝히면서, 학문은 입지(立志)와 지향하는 바(所向)가 중요함을 강조하는 것도 진리의 기준에 대한 끊임없는 요구를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또한, 그의 학문적 개방정신과 더불어 학문의 수양론적 기능에 대한 요구에서, 학문은 습(習)을 귀하게 여기며 습을 통하여 숙(熟)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학습론(學習論)을 엿볼 수 있다. 함양성찰(涵養省察)하는 수양의 과정이 곧 학습이요 살아 움직이는 마음의 배양, 즉 성숙인 것이다. 이수광의 이러한 사상적 성격을 통하여 그의 철학적 특성이 도학의 정통성을 발판으로 하면서도 성리학의 이론적 천착에로 나가는 방향이 아니라, 인격과의 구체적 실현을 추구하는 실학정신의 발휘에로 지향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이수광은 한 선구적 위치와 구실을 감당하고 있는 비중을 지니고 있다 하겠다.
이수광은 66세로 세상을 떠난 뒤에 영의정으로 추증되었으며, 수원의 청수서원(淸水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술로는 《지봉집》 31권, 부록 3권이 있으며 《찬록군서 纂錄群書》 25권이 있다고는 하나 확실하지 않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11)<수색집(水色集)>에서 (2007. 5. 11. 영환(문) 제공) 水色集』(許)권2, 시, 「靜勝堂 與金正卿洪潛甫二兄 夕宴題贈」 會坐高堂晩 蒼茫眼不窮 江村秋雨裏 山郭暝煙中 關塞光陰變 琴樽故舊同 興來情境遠 雲海轉空濛
『水色集』권2, 시, 「贈別金正卿還京」 連鑣行役到天涯 曉夕歡娛罄舊懷 華燭夜堂嬌戲錯 雅琴秋閣正聲諧 他鄕秪喜成佳會 此日那堪作遠乖 却恨龍鍾羈薄宦 歸途不得與君偕
『水色集』권2, 시, 「次金正卿留別韻以重贈」 故園南望路悠悠 送子先歸耐値秋 三更把酒增惆悵 嶺海風霜倦旅遊
『水色集』권2, 시 「 送金正卿 至龍興江上用前韻以贈別」 執手躕踟綠水涯 弦歌那可喩中懷 留連共飮歡猶淺 夙昔相求願始諧 皎皎氷心無變易 紛紛塵世有睽乖 牛頭潭上煙蘿月 白首逍遙庶得偕
*<허적 소개>
허적 許
1563년(명종18) ~ 1640년(인조18). 시조로부터 21세손이다. 자는 자하(子賀), 호는 수색(水色). 또는 상고재(尙古齋)이다.
1588년(선조21)에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고 1593년(선조26) 공직에 나가지 아니하다 1597년(선조30) 별시문과(別試文科) 을과(乙科)에 급제하여 죽산(竹山) 및 양지현감을 역임하고 1607년(선조30)에 형조좌랑 사예군자감정(刑曹佐郞 司藝軍資監正)등에 재임중 1628년(인조6) 유효립(柳孝立)과 당질인 유(逌)등이 선조의 7남 인성군 공(仁城君 珙)을 새로운 왕으로 추대하여 옹립하려는 흉계를 모의하려는 것을 알고 실행전 사전에 고변하여 그 공으로 영사공신일등(寧社功臣一等)에 봉해지고 공조판서 양릉군(工曹判書 陽陵君)에 제수되고 한성판윤을 역임하고 증좌의정(贈左議政)으로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가 77세에 별세하니 왕이 부음을 듣고 예관(禮官)을 보내어 조의를 표하고 불천지묘(不遷之廟)를 지어 화상(畵像)을 그리게 하고 큰 소를 잡아서 성대한 장례(葬禮)를 치루게 하였다.
불천지묘(不遷之廟)는 세월이 오래되어서 없어지고 1998년도에 새로 2층으로 신축하여(尙古齋) 매년 음력 10월 첫째 일요일에 후손들이 모여 효위13위(孝位13位), 비위17위(妣位17위) 합30위패를 모시고 성대한 제향을 올리고 있다.
수색집 문집6권이 규장각에 보존되어 있으며 서문은 교산 허균(蛟山 許筠)이 쓰고 발문은 미수 허목(眉叟 許穆)이 기술하였다. 묘(墓)는 경기도 용인시 원삼면 맹리 의 선영하(先塋下)에 있다.
* 유효립(柳孝立) : 본관 문화(文化). 자 행원(行源). 광해군의 처남인 유희분(柳希奮)의 조카이다. 광해군을 상왕으로 삼고 인조의 숙부인 인성군 공(仁城君 珙)을 추대하려는 모반을 계획했다가 본인과 인성군이 죽임을 당하였다. * 기로소(耆老所) : 조선시대 연로한 고위 문신들의 친목 및 예우를 목적으로 설치한 기구.
1563(명종 18)∼1641(인조 19).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양천(陽川). 자는 자하(子賀), 호는 수색(水色). 참봉 방(昉)의 아들이다. 1588년(선조 21) 진사시에 합격하고, 1597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599년 북청판관으로 있다가 형장(刑杖)을 남용한 죄로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체직되고, 1602년 예조좌랑에서 체직되었다. 1605년 경기좌도경차관(京畿左道敬差官)을 지냈으나 답험(踏驗)의 부정으로 다시 체직되었다가 곧 영천군수를 제수받고,
1607년 형조정랑이 되었다. 1614년(광해군 6) 호조좌랑을 지내기도 하였으나, 이후 벼슬을 하지 않다가 인조반정 이후 복직되었다. 1626년(인조 4) 성균관사예(成均館司藝)로 재직중 조정의 예의를 지키지 않고 제례를 그릇되게 시행하였다는 탄핵을 받기도 하였으나,
1628년 유효립(柳孝立)의 모반사건에 공을 세워 영사공신(寧社功臣)에 녹훈되고 양릉군(陽陵君)에 봉하여졌다. 이후 판서에까지 올랐다. 시문에 능하였으며, 저서로 《수색집》 8권 4책이 있다
12) <성소부부고와 동악선생집>에서 (2007. 5. 14. 영환(문) 제공)
교산 허균
惺所覆瓿稿』(許筠)권1, 詩部 1, 楓嶽紀行, 「金水潭正卿墅作[前妻娚矱也 同年司馬]」 層嶂帶茅茨 煙蘿斂暝姿 誰知靜者意 不負故人期 日落巖泉媚 風生竹樹悲 東峯有初月 謝眺得新詩
수담(水潭) 김 정경(金正卿)의 별장에서 짓다
전처남(前妻娚) 확(矱)인데, 나와 같은 해에 사마(司馬)에 합격하였다.
층층진 메 띳집을 빙 둘렀는데 / 層嶂帶茅茨 등라(藤蘿)엔 어둔 연기 활짝 걷혔네 / 煙蘿斂暝姿 고요한 자의 뜻을 뉘라 알리요 / 誰知靜者意 친구의 기약을 아니 저버려 / 不負故人期 해가 지니 돌샘은 한결 더 곱고 / 日落巖泉媚 바람 이니 대나무는 슬퍼하누나 / 風生竹樹悲 동녘 봉에 초생달 돋아오르니 / 東峯有初月 사조는 새론 시를 얻겠군그래 / 謝朓得新詩
『惺所覆瓿稿』권9, 文部6, 書,
「與金甥正卿書」
見手滋 如挹芝宇 況承慰問切至 欣感交幷 官爵是外物 一斥奚病 僕之平生 爲裕甫所毀了者甚多 頃自湖南屆全州 則裕甫適丁母憂 初喪處事 縱曰頗甚才盡 外客安從而知之乎 有人毀裕甫者 引僕爲證 洛下人初見僕 爭問其由 裕甫曾陷我以在服不謹 則其初喪 用印盜出官物 濫杖下人等事 我縱目覩 豈可掛諸口吻 有若報復者然 是以 問者百人 俱皆以不能知答之 用是致疑於僕 遂謂今反相結 至忝於謀議云 則冤孰甚焉 養吾聞此言而來語 則在僕初無是事 固當自辨 裕甫之迫問奇宋二家 豈亦僕勸而爲之乎 見忤之端 寔出於玆 厥後兄家結婚於內 賤隷數人承裕甫旨 欲間冢宰於上 造出諺書搆諸貴人 遂起紛擾之端 其致疑固其所也 今士大夫姻家新婦之季父 不敢以諺書通于其姑 矧阙中嚴邃之地乎 久則自當釋然 聊不與辨 僕素不喜榮官 今得一事自罷 秋雨乍收 近當一馬往訪仙山 仍爲東還計 此時君若在潭墅 則過宿數宵 劇談今古 甕頭潼醴 可以餉不飮客 而石筍沙鼈 足以供案肴 須掃風軒以俟 終不負約 只此
처남 김 정경(金正卿)에게 준 글
수서(手書)를 받아 얼굴을 보는 것 같은데, 더구나 위문이 지극하니 기쁨과 느꺼움이 한꺼번에 밀려오네. 관작은 외물(外物)이라, 한 번 배척받았다 해서 어찌 근심하겠는가. 내 평생에 유보(裕甫 이홍로(李弘老)의 자)로 인해 훼방을 당한 것이 심히 많았다. 지난번 호남으로부터 전주에 당도했을 적에 유보가 마침 모친의 상을 당해서 초상의 처사가 비록 대단히 미진했다 할지라도 외방(外方)에서 온 객이 어떻게 그 일을 알 수 있었겠는가. 유보를 욕하는 사람 가운데 어떤 이가 나를 끌어들여 증인으로 삼으려 하니, 사람들은 나를 보자마자 다투어 그 경위를 묻곤 하였네. 그러나 유보는 일찍이 내가 복중(服中)의 상제로서 행실에 근실치 못하다 하여 욕을 했던 적이 있으니, 그가 초상 중에 도장을 사용해서 관물을 도둑질해내고 하인을 마구 때린 따위의 일을 설사 내가 눈으로 보았다 한들 어찌 그것을 입에 담아 마치 보복하는 것처럼 할 수 있겠는가. 이 까닭에 묻는 사람이 백이 넘었으나 모두 잘 모른다고 답을 했었네. 이 때문에 의심이 나에게 미치게 되어 마침내 이르기를 '이제는 오히려 서로 결탁하여 모의하는 데 이르렀다.'고들 하니, 원통함이 이보다 심한 것이 어디 있겠는가. 양오(養吾 이지완(李志完)의 자)가 이 말을 듣고 와서 말을 하니, 내 자신에 있어서는 애당초 이런 일이 없었던 바라 내 입으로 변론해 두려는 것이네. 유보가 기(奇)ㆍ송(宋) 두 집안에 다그쳐 물은 것도 어찌 또한 내가 친하여 그런 것이겠는가. 미움을 받게 된 발단이 진실로 이에서 나온 것이네. 그 후에 형님댁에서 대내(大內)와 혼인을 맺을 때 천례(賤隷) 수인이 유보의 명을 받아 총재를 위에다 이간질하기 위해 언서(諺書)를 조작해서 귀인들을 얽어매자 드디어 분요의 발단이 일어나게 되었으니, 그 의심을 부른 것은 진실로 당연한 일이네. 오늘날 사대부의 인가(姻家)에서도 신부의 계부(季父)가 감히 언어로써 그 시어머니에게 통할 수는 없는 터인데, 하물며 궁궐 속의 엄하고 깊은 곳에서 어찌 그리한단 말인가. 오래 있으면 저절로 밝혀질 것이기에 변명하지 않으려 했던 것이었네. 나는 본디 벼슬의 영달을 좋아하지 않았는데, 이제 한 사단을 얻어 절로 파직하게 되었으니, 가을 비가 잠깐 걷히면, 마땅히 한 필 말을 타고 자네 집을 찾아 보고 인하여 동쪽으로 돌아갈 계획을 세웠네. 이 때쯤 자네가 만약 별장에 있으면 지나는 길에 며칠을 묵으면서 고금을 극담키로 하세. 단지에 남은 단술로는 술 못하는 손을 대접할 수 있겠고, 석순(石筍)과 자라로는 술상 안주로 족할 것이니, 모름지기 바람 난간을 치우고 기다리게. 끝내 약속을 저버리지 않을 것일세. 이만 그치네
수담(水潭) 김 정경(金正卿)의 별장에서 짓다 전처남(前妻娚) 확(矱)인데, 나와 같은 해에 사마(司馬)에 합격하였다. 층층진 메 띳집을 빙 둘렀는데 / 層嶂帶茅茨 등라(藤蘿)엔 어둔 연기 활짝 걷혔네 / 煙蘿斂暝姿 고요한 자의 뜻을 뉘라 알리요 / 誰知靜者意 친구의 기약을 아니 저버려 / 不負故人期 해가 지니 돌샘은 한결 더 곱고 / 日落巖泉媚 바람 이니 대나무는 슬퍼하누나 / 風生竹樹悲 동녘 봉에 초생달 돋아오르니 / 東峯有初月 사조는 새론 시를 얻겠군그래 / 謝朓得新詩
성소부부고 제1권 시부 1 - 풍악기행(楓嶽紀行)
석주(石洲)에게 준 글 서울에 있을 적에 형이 강도(江都)에서 보낸 편지를 받아보니, 나의 벼슬 잃음을 위로한 말씀이었습니다. 이때 나는 이미 수레를 단속하여 도성문을 나오는 참이었는데, 찾아 온 사환이 편지를 놓고 떠나겠다 하기에 총망중이라 답장을 쓰지 못했으니, 우물쭈물 결례한 죄를 피할 길이 없습니다.
나는 집을 떠난 이틀 만에 김 정경(金正卿)의 영평(永平) 별장에 닿으니 천학(泉壑)과 계산(溪山)의 아름다움은 지난해에 못지 않았으나, 다만 한스러운 것은 대관(臺館)이 허물어진 것을 다시 세우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방안에 들어가니 단술이 항아리에 가득하여 향의(香蟻 술독에 뜬 쌀을 벌레에 비유한 것)가 한창 굼실거리니 형을 초치해다가 큰 술잔으로 권하지 못한 것이 한스러울 뿐이었습니다. 형이 이 말을 들으면 반드시 군침을 흘릴 것입니다. 지금에 이르러도 성벽에는 고죽(孤竹 최경창(崔慶昌)의 호)ㆍ하곡(荷谷 허봉(許篈)의 호)의 시가 남아 있어 청초하여 읊을 만했고 또 자민(子敏 이안눌(李安訥)의 자)의 시가 있었으나 바빠서 화운을 하지 못했습니다.
성소부부고 제9권 문부 6(文部六) - 서(書)
권필 [權韠, 1569~1612]
본관 안동. 자 여장(汝章). 호 석주(石洲). 정철(鄭澈)의 문인. 과거에 뜻이 없어 시주(詩酒)로 낙을 삼고, 가난하게 살다가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임명되었으나 이를 사양하고 끝내 취임하지 않았다. 강화부(江華府)에 갔을 때 많은 유생들이 몰려오자 이들을 모아 가르쳤고, 이정구(李廷龜)가 대문장가(大文章家)로 알려진 명나라 사신(使臣) 고천준(顧天俊)을 접반하게 되어 문사(文士)를 엄선할 때 야인으로서 이에 뽑혀 문명을 떨쳤다.
이에 앞서 임진왜란 때는 주전론(主戰論)을 주장하였고, 광해군 초에 권신(權臣) 이이첨(李爾瞻)이 교제하기를 청하였으나, 끝내 거절하였다. 광해군 비(妃) 유씨(柳氏)의 아우 유희분(柳希奮) 등 척족(戚族)들의 방종을 궁류시(宮柳詩)로써 비방하자, 광해군이 대로(大怒)하여 시(詩)의 출처를 찾던 중, 1612년 김직재(金直哉)의 옥(獄)에 연루된 조수륜(趙守倫)의 집을 수색하다가 그의 시가 발견되어 친국(親鞫) 받은 뒤 유배되었다. 귀양길에 올라 동대문 밖에 이르렀을 때 사람들이 주는 술을 폭음하고 이튿날 죽었다.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 후 사헌부지평에 추증되었으며, 광주(光州) 운암사(雲巖祠)에 배향되었다. 《석주집(石洲集)》과 한문소설 《주생전》이 현전한다.
허균(許筠) 1569(선조 2)∼1618(광해군 10).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양천(陽川). 자는 단보(端甫), 호는 교산(蛟山)·학산(鶴山)·성소(惺所)·백월거사(白月居士).
<동악 이안눌>
東岳先生集』(李安訥)권17, 東遷錄 하, 「奉謝原州金明府[矱]正卿手札見問 送燒酒一甁 鷄兒二首」 (一) 多謝平原牧 開緘手自題 我觀今日意 君與古人齊 對使先斟酒 呼童旋殺鷄 羈艱成一飽 不省醉如泥 (二) 山村閏六月 一日度如年 小市稀新穀 空廚冷暮煙 誰言羈客苦 却荷故人怜 擧室啼飢處 陶然自醉眠 (三) 七尺癯形一老僧 異方羈滯病侵凌 峽深本自無先業 鄕僻何曾有舊朋 莊粟縮儲妨夏閏 市鹽增價怯年登 終朝啖菜窮居味 欲報隣州寫未能
이안눌(李安訥) 1571(선조 4)∼1637(인조 15).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자민(子敏), 호는 동악(東岳). 행(荇)의 증손으로 진사 형(泂)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경주이씨이다. 재종숙부인 사헌부감찰 필(泌)에게 입양되었다. 이식(李植)의 종숙(從叔)이다. 18세에 진사시에 수석합격하였으나 동료들의 모함을 받자, 과거 볼 생각을 버리고 문학에 열중하였다. 동년배인 권필(權鞸)과 선배인 윤근수(尹根壽)·이호민(李好閔) 등과 교우를 맺었는데, 이러한 모임을 동악시단(東岳詩壇)이라고 하였다. 29세 때 다시 과거에 나아가 문과에 급제하였다. 여러 언관직(言官職)을 거쳐 예조와 이조의 정랑으로 있다가 1601년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성균직강(成均直講)으로 옮겨 봉조하(奉朝賀)를 겸하였다. 공조로 옮겼다가 주시관(主試官)으로 호서와 관서에 나갔으며, 다시 예조에 들어왔다가 단천군수가 되었다.
1607년 홍주목사·동래부사를 거쳐 1610년 담양부사가 되었으며, 1년 만에 병을 이유로 돌아왔다. 3년 후에 경주부윤이 되었다가 곧 호조참의 겸 승문원부제조로 임명되었다. 동부승지에서 좌부승지가 된 뒤 사직하고 강화부사가 되었다. 어머니의 3년상을 마치고, 인조반정으로 예조참판에 임명되었으나 비방하는 말들이 생겨 사직하였다. 이듬해 이괄(李适)의 난에 방관하였다는 이유로 귀양을 갔다.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사면되어 강도유수(江都留守)에 임명되었다. 1631년 함경도관찰사가 되었으며, 다음해 예조판서 겸 예문관제학을 거쳐 충청도도순찰사에 제수되었다.
조정에서 청렴근면한 관리를 뽑는 데 들게 되어 숭정대부(崇政大夫)의 가자(加資)를 받고, 형조판서 겸 홍문관제학에 임명되었다. 이해(1636년) 겨울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병중의 몸을 이끌고 왕을 호종하여 남한산성으로 갔다가 환도한 뒤에 병세가 악화되어 죽었다. 특히 시작에 주력하여 문집에 4, 379수라는 방대한 양의 시를 남기고 있다. 두보(杜甫)의 시를 만번이나 읽었다고 하며, 시를 지을 때 일자일구도 가벼이 쓰지 않았다고 한다. 특히, 당시(唐詩)에 능하여 이태백에 비유되었고 글씨도 잘 썼다. 정철(鄭澈)의 〈사미인곡〉을 듣고 지은 〈문가 聞歌〉가 특히 절창이라 일컬어졌고, 임진왜란이 끝난 다음 동래부사로 부임하여 지은 〈동래사월십오일 東萊四月十五日〉은 사실적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국난을 형상화시킨 장편시로서, 왜적이 동래에 쳐들어왔을 때 관민이 함께 막으려다 장렬하게 전사한 사연을 담고 있다.
그의 시는 고답적 표현을 버리고 절실한 주제를 기발한 시상으로 표현한 점에서 높이 평가된다. 그의 문집에 실린 시는 자신이 옮겨다닌 고장을 중심으로 묶여 있어서 그 지방의 민중생활사 및 사회사적 자료를 담고 있으며, 특히 그의 생애가 임진왜란·병자호란의 양란에 걸쳐 있으므로 국난에 피폐해진 당시의 상황을 추적하여 볼 수 있다. 또한, 명나라로 사행가면서 지은 그의 시에서는 대명교섭사(對明交涉史)의 자료를 발견할 수 있다. 숭록대부의정부좌찬성 겸 홍문관대제학·예문관대제학에 추증되었다. 담양의 구산서원(龜山書院)과 면천의 향사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혜(文惠)이다. 저서로는 《동악집》 26권이 있다.
13) <청음선생집>과 <다산집>에서 (2007. 5. 14. 영환(문) 제공)
『淸陰先生集』(金尙憲)권4, 오언율시, 「鐵原府伯金正卿言三釜落水窮處有一村 眞避亂之地 路險不得到 悵望賦之[正卿名矱]」 楣靈湫上 深藏避世村 生涯自耕鑿 洞府別乾坤 黃綺高風遠 朱陳舊俗存 一廛容我住 何必問桃源
『淸陰先生集』권4, 오언율시, 「豐田驛 自壬辰兵後無館宇 行旅病之 府伯金正卿新構小堂 堂成而余行適至 余至而久旱適雨 喜而賦之」 古驛堂新闢 春官奉使廻 東民三月望 好雨此時來 喜色歸農畝 歡情溢酒杯 天時與人事 今日摠佳哉
김상헌(金尙憲)1 1570(선조 3)∼1652(효종 3). 조선 인조·효종 때의 상신(相臣). 본관은 안동. 자는 숙도(叔度), 호는 청음(淸陰)·석실산인(石室山人:중년 이후 楊州 石室에 退歸해 있으면서 사용)·서간노인(西磵老人:만년에 安東에 은거하면서 사용). 서울출생. 돈녕부도정(敦寧莩正) 극효(克孝)의 아들이며, 우의정 상용(尙容)의 동생이다. 3세 때 큰아버지인 현감 대효(大孝)에게 출계(出系)하였다. 1590년(선조 23) 진사가 되고 1596년 전쟁중에 보인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권지승문원부정자(權知承文院副正字)에 임명되었으며, 이후 부수찬·좌랑·부교리를 거쳐 1601년 제주도에서 발생한 길운절(吉雲節)의 역옥(逆獄)을 다스리기 위한 안무어사(安撫御史)로 파견되었다가 이듬해 복명, 고산찰방(高山察訪)과 경성도호부판관(鏡城都護府判官)을 지냈다. 1608년(광해군 즉위년) 문과중시에 급제, 사가독서(賜暇讀書)한 후 교리·응교·직제학을 거쳐 동부승지가 되었으나 이언적(李彦迪)과 이황(李滉) 배척에 앞장선 정인홍(鄭仁弘)을 탄핵하였다가 광주부사(廣州府使)로 좌천되었다. 1613년 칠서지옥(七庶之獄)이 발생, 인목대비의 아버지인 김제남(金悌男)이 죽음을 당할 때 혼인관계(김상헌의 아들 光燦이 김제남의 아들 $협01의 사위가 됨.)로 인해 파직되자 집권세력인 북인의 박해를 피하여 안동군 풍산으로 이사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 이후 이조참의에 발탁되자 공신세력의 보합위주정치(保合爲主政治)에 반대, 시비(是非)와 숙특(淑慝:善惡)의 엄격한 구별을 주장함으로써 서인 청서파(淸西派)의 영수가 되었다. 이어 대사간·이조참의·도승지·부제학을 거쳐, 1626년(인조 4) 성절 겸 사은진주사(聖節兼謝恩陳奏使)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이후 육조의 판서 및 예문관·성균관의 제학 등을 지냈다. 1632년 왕의 생부를 원종(元宗)으로 추존하려는 데 반대하여 벼슬에서 물러났다. 1635년 대사헌으로 재기용되자 군비의 확보와 북방 군사시설의 확충을 주장하였고, 이듬해 예조판서로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주화론(主和論)을 배척하고 끝까지 주전론(主戰論)을 펴다가 인조가 항복하자 안동으로 은퇴하였다. 1639년 청나라가 명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요구한 출병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청나라에 압송되어 6년 후 풀려 귀국하였다. 1645년 특별히 좌의정에 제수되고, 기로사에 들어갔다. 효종이 즉위하여 북벌을 추진할 때 그 이념적 상징으로 대로(大老)라고 존경을 받았으며, 김육(金堉)이 추진하던 대동법에는 반대하고 김집(金集) 등 서인계 산림(山林)의 등용을 권고하였다. 윤근수(尹根壽)의 문하에서 경사(經史)를 수업하고, 성혼(成渾)의 도학에 연원을 두었으며, 이정구(李廷龜)·김유(金#유34)·신익성(申翊聖)·이경여(李敬輿)·이경석(李景奭)·김집 등과 교유하였다. 1653년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1661년(현종 2) 효종 묘정에 배향되었다. 양주 석실서원(石室書院), 정주 봉명서원(鳳鳴書院), 개성 숭양서원(崧陽書院), 제주 귤림서원(橘林書院), 정평 망덕서원(望德書院), 함흥 창덕서원(彰德書院), 경성 경산서원(鏡山書院), 의주 기충사(紀忠祠), 광주 현절사(顯節祠), 상주 서산서원(西山書院), 종성 화곡서원(華谷書院), 안동 서간사(西磵祠), 예안 운계사(雲溪祠), 정평 모현사(慕賢祠)에 제향되었다. 시문과 조천록(朝天錄)·남사록(南槎錄)·청평록(淸平錄)·설교집(雪窖集)·남한기략(南漢紀略) 등으로 구성된 《청음전집》 40권이 전한다.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茶山集』(睦大欽)권1, 칠언절구, 「直中次金正卿韻二首」 (一) 前宵孤夢返山門 松桂蒼蒼雪裏存 自是故園多物色 賦歸何待鑑湖恩 (二) 自古儒流不異門 況吾交契夙心存 靑綾伴直殆天假 到底無非聖主恩
『茶山集』권2, 칠언절구, 「 和金正卿別業韻」 多君卜築占名區 物外風煙又一秋 磴道逶迤臨鏡面 林亭隱約坐巖頭 平沙雁落潮侵岸 古渡人空月上舟 安得便從仙侶去 醉攀丹桂共淹留
목대흠(睦大欽) 1575(선조 8)∼1638(인조 16).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사천(泗川). 자는 탕경(湯卿), 호는 다산(茶山) 또는 죽오(竹塢). 이조참판 첨(詹)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증병조판서 정건(鄭謇)의 딸이다. 1601년(선조 34) 진사가 되고, 1605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607년 성균관직강(成均館直講)·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을 거쳐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이어 부응교(副應敎)·집의(執義)를 거쳐, 1612년 광주목사(廣州牧使)를 지내고 공조참판·부승지 등을 역임하였다.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영의정 이원익(李元翼)의 종사관으로 종군하여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웠다.
1632년 예조참의가 되고 이듬해 강릉부사가 되었는데, 민심을 얻어 나중에 유애비(遺愛碑)가 세워졌다. 천성이 고결하고 시문에 뛰어났다. 통훈대부(通訓大夫)·홍문관교리(弘文館校里)·지제교 겸 경연시독관(知製敎兼經筵侍讀官)에 추증되었다. 저서로는 《다산집 茶山集》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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