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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백범 묘비문 (2009. 6. 26. 영환(문) 제공) 大韓民國臨時政府 主席 白凡 金九之墓
백범 김구 선생은 사천이백구년 병자 음 칠월 십일일 자시 해주 백운방 터골 안동 김순영 현풍 곽낙원의 외아들로 나 해주 최준례 맞어 인, 신 형제 두니라. 글을 즐겨 십칠세에 과거 보다. 아버님 임종에 살어여 먹이더니 늙어도 어머님 가르침 받더라. 의에 굳음이 인격의 터리라. 갑오동란에 선봉장되어 해주성 치니 십구세라. 선비 고능선께 충의 배우다. 이십일세 치하포의 한 칼로 국모원수 갚고 사형 받더니 광무황제 분부로 살아 중 되니라. 이십오세 예수 믿어 새 교육 일으키며 신민회하다. 삼십육세 안명근일과 양긔탁일에 걸려 십칠년형 지다가 오년 만에 나오다. 긔미 삼일운동에 상해 나가 우리 정부 문지기 원하니 사십사세라. 오십이세 대한민국임시정부부 주석 되어 끝내 태극긔를 지키다. 오십오세 한국독립당 꾸며 이끌다. 오십육세 한인애국단 만드니 이듬해 이봉창 윤봉길 만나다. 이에 중국 장개석 주석과 알아 대접받다. 이차대전으로 정부와 동지를 중경 옮기니 육십삼세라. 육십오세 한국광복군 꾸며 훈련하다. 육십칠세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으로 일본에 선전하다. 카이로 회담에 장개석 주석이 우리 독립 말하니라. 을유 팔일오 해방으로 갈린 만세 속에 서울 오니 칠십세라. 그해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으로 반탁운동 일으키다. 국민의회 끌어 미소군정 말고 우리 정부 종하다. 칠십삼세 평양 남북협상에 화평통일 웨치다. 백범일지의 나의 소원은 민족의 말이러라. 긔축 유월 이십육일 오시 서울 경교장 서실에서 총 맞으니 칠십사세라. 항공 중령 신이 이으니 한간 집 한 뙈기 밭 물림 없더라. 국민장의로 칠월오일 서울 효창공원에 모시니 태백의 정긔가 서리더라
단기 사천이백팔십이년 십일월 이십사일 백범김구선생국민장의위원회 세움
찬자 : 임시정부 국무위원 조완구(趙琬九, 1881~1954) 서자 : 예술원회원 서예가 김충현(金忠顯, 1921~2006)
서기 1999년 4월 12일 부인 최준례 여사와 효창원에 합장(合葬) ▶조완구(趙琬九) 비문을 지은이로 호는 우천(藕泉). 1881년 3월 20일 서울에서 출생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내무주사직을 사직하고, 10년 국권피탈 후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하여 동지사(同志社)를 결성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중국 상하이[上海]로 건너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 의정원 의원으로 활동하였고, 이어 1921년 임시정부 내무차장, 1923년 상하이 한국인거류민단의사회 의사장, 1924년 노동총판이 되었다. 1935년 광복전선(光復戰線) 결성에 참여하여 난징[南京]에서 전단·표어 등을 배포하며 독립운동을 전개하였고, 1936년 김구(金九)·이시영(李始榮)과 함께 한국국민당 결성을 주도하였다. 1944년 임시정부 내무부장에 이어 재무부장을 역임하고, 1945년 광복이 되자 임시정부 국무위원 자격으로 귀국하였다. 그 후 한국독립당 비서부장으로 과도정부 수립을 위한 비상국민회의 재무위원장, 민주의원 의원, 좌우합작위원회 위원, 남조선과도입법의원 의원 등의 직책을 맡으면서 중앙정계에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신탁통치반대·남한단독정부수립반대 등 시종 김구의 중립노선을 따랐으며, 1948년 평양에서 열린 남북협상에 참여하여 남북 15요인 회담의 일원으로 활동하였다. 6·25전쟁 때 납북되었다. 1989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김충현(金忠顯) 비문의 글씨를 쓴 서예가로 1921년 김윤동(金潤東)의 차남으로 서울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서경(恕卿), 호는 일중(一中)이다. 증조부 김석진(金奭鎭)은 고종 때 형조판서를 지내고 조부 김영한(金甯漢)은 광무연간에 용인 군수를 지내는 등 조선 후기 학예를 주도했던 안동 김씨 집안에서 가학을 이었다. 한글 서예 보급에 선도적인 역할을 한 여초(如初) 김응현(金膺顯)은 동생이다. 일가이자 조부의 절친이었던 서화가 김용진(金容鎭)으로부터 서예를 익혔다. 당시의 저술에서는 『훈민정음』, 『용비어천가』 등의 옛 판본체에 전서와 예서의 필법을 가미하여 고안한 서체를 선보였는데, 정인보(鄭寅普)에 의해 일명 ‘고체(古體)’로 명명된 글씨였다. 궁중에서 쓰던 궁체(宮體)를 연구하여 한글 서예의 보급에 노력하였고, 1947년에 쓴 「유관순 기념비」는 해방 이후 최초의 한글 비문으로, 이후의 한글 비문 제작에 견인차가 되었다. 경동공립중학교·경동고등학교 국어교사, 동방연서회(東方硏書會) 창립, 일중묵연(一中墨緣) 개설, 오산학교(梧山學校) 이사장 등을 통해 후진 양성을 하였고, 한국 서예가 협회장, 국전 운영위원, 대한민국 예술원 정회원 등을 역임하며 서단의 지도적 역할을 하였다. 2006년 11월 23일 별세하였다. 작품으로 「윤봉길 열사 기의비」(1949), 「백범 김구 선생 묘비」(1950), 「사육신 묘비」(1955), 「4.19혁명 기념탑」(1960), 「탑동공원 사적비」(1967), 「삼국통일 기념비」(1977), 「서봉 김사달 박사 묵적비」(1982), 「인촌 김성수 선생 묘비」(1989) 등이 있다. 저서로 『우리 글씨체』, 『서도집성(書道集成)』, 『근역서보(槿域書譜)』, 『일중 김충현 서집(一中金忠顯書集)』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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