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진국사비명-김효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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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완식 작성일18-12-27 21:07 조회939회 댓글0건본문
圓眞國師碑銘題額」
高麗國寳鏡寺住持大禪師贈諡圓眞國師碑銘幷序」
通議大夫樞密院右副承宣試國子監大司成 賜紫金魚袋臣李公老奉 宣撰」
夫一心者萬法之揔六度萬行莫不由是而生焉然性有利鈍迷悟不同故若垢衣纒寳而未見或濁水求珠而未得迷之者猶如地塵埃▨▨▨▨▨▨▨▨▨▨▨▨」
我如來出現於世說三乘十二分敎或立毗尼攝護之藏或示禪那證入之門盖爲重生機根淺深不同也於是後之學者各立宗趣互相矛盾▨▨▨▨▨▨▨▨▨▨」
膠於空有以自病病他者滔滔皆是若夫空有兩忘雙弘禪敎者其惟 我圓眞國師乎師諱承逈字永迴俗姓申氏上洛山陽人也家世業儒父通漢以▨▨▨▨▨▨▨」
內給事出倅錦城而卒於任母亦早逝師三歲而孤鞠於叔父侍御史光漢聦悟夙發自孩抱未甞戲翫七歲依雲門淵實禪師凡發言擧事多出人意表衆皆曰▨▨▨」
神童十三投曦陽山鳳嵓寺洞純師剃落其髮明年就金山寺戒壇受具於是戒珠明郞法器泓澄純公愛重異常然師雅意不樂名敎將以振衣高擧雲蹝鶴態▨▨▨」
林壑而以純師老故不能勇往越丁巳春例赴普濟寺談禪法會純公凶訃至將赴喪就叔父侍御君曰人生若朝露富貴如浮雲吾於世味若嚼蠟然今吾師永逝而▨」
便去以成吾志乃杖策經往時 明廟當宇素聞師之道行及於抄選詔有司有司特加抄錄此不拘凡例也是年秋宗門耆宿輩皆固勸於是赴廣明寺選佛場對問若空虛」
之傳聲飛辯如懸河之注水聞者莫不澘然場內中使及證官碩德皆下床拱立而聴擢爲上上品然師旣於名利殊無芥滯但欲遊歷名山遂往叅曹溪山普照國師次」
決法要後詣江陵郡五臺山禮 文殊遂得冥感又往淸平山訪眞樂公之遺跡因見文殊寺記公謂門人曰首楞嚴經乃印心宗發明要路之語惻然感之遂駐錫聞性」
庵閱盡楞嚴經洞諸相之幻妄識自心之廣大始信抄旨有宿習甞發願往往弘揚法敎必以是經爲首此法盛行於世自師始也泰和八年戊辰命住皆骨山楡岾寺」
庚午秋當時貴戚修京畿演法寺開設法會奏以師爲法主仍致書固請於是來赴京師今相國淸河公率門下簪履數千人出迎於城東郭注寺欣然傾盖之歡對以摳
衣之禮如以石投水脗然相合公自是尤重禪風使曹溪法乳盡振東土豈非宿緣所感耶至 康廟卽政之三年批受三重大師師固讓欲避時晉康公秉政承」
上旨敦諭至切强以就職是年冬 上召入秘殿點破禪錄特加敬重因遣中使內侍大官署令邵敬輿重修所住精舍先是師甞寓楓嶽普德崛有異夢及是而驗之歲」
在癸酉今 上踐祚繼述先志以二年甲戌 命設落成法會大弘禪旨下 批爲禪師是年春 上徵入秘殿以尙衣直長同正徐稚之子代而剃髮明年秋又加大禪師」
因詔住東京理內淸河縣寶鏡寺先是命住淸平山文殊寺雪嶽寒溪寺而皆固辭不就至是而强之亦非師意也雲門山有伏安寺者乃降賊主萃淵藪舊染之餘或未」
頓正堂頭老宿患之欲開悟以導自新之路請師別張法會演說六祖壇經群賊皆感悟流涕無復萌於兇焰自是一方晏然高枕至庚辰春 太上王親囑第四子手落」
其髮今珍丘寺住持禪師鏡智是也昔於淸道郡七葉寺叢林久無雨井泉渴涸衆皆患之師齋心滌慮談揚慈覺禪師所說比如沙渴羅龍王不離大海不出深宮惟以」
一念慈悲心興布慈雲灑甘露之話續演說至一夜霈然下雨又在公山念佛蘭若與兩三道半會于東峰煮茗時大旱師謂曰今驕陽爲沴苗稼焦枯可忍視耶乃」
點一碗茶置嵓石上禱于阿羅漢以禪月和尙禮懺文作梵唱未畢而膏雨忽降田畝告足凡師之德行所感多類此師以傳道授業爲事內冥大妙之城外應無窮之機」
若傳燈而相續或瀉甁而不渴四方學者仰如山斗圓月炤海無波不明甘露零天無物不潤其承訓誨若時雨化者不可勝數矣至大金貞祐九年辛巳夏會訓下淸流」
說楞嚴經尤加勤勵忽一日顧謂衆曰正法難遇猶如龜木吾亦不久於世請諸尊宿母虛度光陰勉弘末法以稱佛意衆皆愕然至季夏示微恙沈綿寢深猶不輟講演」
至七月移居于公山念佛寺與元正靑林二禪老從容談道至八月二十有八日剃頭澡浴九月初二日喚侍側者更衣因坐繩床命唱梵侍者請臨終偈師擧目熟視曰」
這癡漢我平生曾不作一偈今作什麼偈耶因叩繩床三下而寂視之已化矣顔色不
變舉軆如生嗚呼達人之通觀也以死生同爲一体言笑自若無去來之想非有自」
證之力安能如是耶以十月十日門徒五十餘人奉靈輿茶毗于公山南麓明日拾靈骨移葬于神龜山立塔報齡五十一法臘二十有四 上聞訃震悼追贈國師贈諡」
曰圓眞門人以樹碑事聞于朝 上乃命臣松老撰辭臣以文職忝在樞近不可以學識淺薄爲辭乃據門徒所錄行狀强序而銘之曰
梵雄西現 法舸其東 區分宗趣 派別流通 輪轅異用 致遠一功 禪敎異門 證覺惟同 繄我圓眞 寔曰雙弘 心如止水 頓炤眞空 戒譬秋月」
夐出塵籠 法若春泉 利物無窮 攀鱗附翼 龍象門叢 口授心傳 玄關洞開 顯滅有時 隻履西廻 門從濟濟 香山其頹 請勒遺蹝 示厥後來
命撰受辛 濫及非才 敢拜稽首 矍然而哉 卓爾芳名 千載▨雷」
將仕郞大官署丞兼寶文閣校勘臣金孝印奉 宣書」
甲申五月 日 沙門 慧寂等 立石」
〔출전 : 『韓國金石全文』 中世下(1984)〕
高麗國寳鏡寺住持大禪師贈諡圓眞國師碑銘幷序」
通議大夫樞密院右副承宣試國子監大司成 賜紫金魚袋臣李公老奉 宣撰」
夫一心者萬法之揔六度萬行莫不由是而生焉然性有利鈍迷悟不同故若垢衣纒寳而未見或濁水求珠而未得迷之者猶如地塵埃▨▨▨▨▨▨▨▨▨▨▨▨」
我如來出現於世說三乘十二分敎或立毗尼攝護之藏或示禪那證入之門盖爲重生機根淺深不同也於是後之學者各立宗趣互相矛盾▨▨▨▨▨▨▨▨▨▨」
膠於空有以自病病他者滔滔皆是若夫空有兩忘雙弘禪敎者其惟 我圓眞國師乎師諱承逈字永迴俗姓申氏上洛山陽人也家世業儒父通漢以▨▨▨▨▨▨▨」
內給事出倅錦城而卒於任母亦早逝師三歲而孤鞠於叔父侍御史光漢聦悟夙發自孩抱未甞戲翫七歲依雲門淵實禪師凡發言擧事多出人意表衆皆曰▨▨▨」
神童十三投曦陽山鳳嵓寺洞純師剃落其髮明年就金山寺戒壇受具於是戒珠明郞法器泓澄純公愛重異常然師雅意不樂名敎將以振衣高擧雲蹝鶴態▨▨▨」
林壑而以純師老故不能勇往越丁巳春例赴普濟寺談禪法會純公凶訃至將赴喪就叔父侍御君曰人生若朝露富貴如浮雲吾於世味若嚼蠟然今吾師永逝而▨」
便去以成吾志乃杖策經往時 明廟當宇素聞師之道行及於抄選詔有司有司特加抄錄此不拘凡例也是年秋宗門耆宿輩皆固勸於是赴廣明寺選佛場對問若空虛」
之傳聲飛辯如懸河之注水聞者莫不澘然場內中使及證官碩德皆下床拱立而聴擢爲上上品然師旣於名利殊無芥滯但欲遊歷名山遂往叅曹溪山普照國師次」
決法要後詣江陵郡五臺山禮 文殊遂得冥感又往淸平山訪眞樂公之遺跡因見文殊寺記公謂門人曰首楞嚴經乃印心宗發明要路之語惻然感之遂駐錫聞性」
庵閱盡楞嚴經洞諸相之幻妄識自心之廣大始信抄旨有宿習甞發願往往弘揚法敎必以是經爲首此法盛行於世自師始也泰和八年戊辰命住皆骨山楡岾寺」
庚午秋當時貴戚修京畿演法寺開設法會奏以師爲法主仍致書固請於是來赴京師今相國淸河公率門下簪履數千人出迎於城東郭注寺欣然傾盖之歡對以摳
衣之禮如以石投水脗然相合公自是尤重禪風使曹溪法乳盡振東土豈非宿緣所感耶至 康廟卽政之三年批受三重大師師固讓欲避時晉康公秉政承」
上旨敦諭至切强以就職是年冬 上召入秘殿點破禪錄特加敬重因遣中使內侍大官署令邵敬輿重修所住精舍先是師甞寓楓嶽普德崛有異夢及是而驗之歲」
在癸酉今 上踐祚繼述先志以二年甲戌 命設落成法會大弘禪旨下 批爲禪師是年春 上徵入秘殿以尙衣直長同正徐稚之子代而剃髮明年秋又加大禪師」
因詔住東京理內淸河縣寶鏡寺先是命住淸平山文殊寺雪嶽寒溪寺而皆固辭不就至是而强之亦非師意也雲門山有伏安寺者乃降賊主萃淵藪舊染之餘或未」
頓正堂頭老宿患之欲開悟以導自新之路請師別張法會演說六祖壇經群賊皆感悟流涕無復萌於兇焰自是一方晏然高枕至庚辰春 太上王親囑第四子手落」
其髮今珍丘寺住持禪師鏡智是也昔於淸道郡七葉寺叢林久無雨井泉渴涸衆皆患之師齋心滌慮談揚慈覺禪師所說比如沙渴羅龍王不離大海不出深宮惟以」
一念慈悲心興布慈雲灑甘露之話續演說至一夜霈然下雨又在公山念佛蘭若與兩三道半會于東峰煮茗時大旱師謂曰今驕陽爲沴苗稼焦枯可忍視耶乃」
點一碗茶置嵓石上禱于阿羅漢以禪月和尙禮懺文作梵唱未畢而膏雨忽降田畝告足凡師之德行所感多類此師以傳道授業爲事內冥大妙之城外應無窮之機」
若傳燈而相續或瀉甁而不渴四方學者仰如山斗圓月炤海無波不明甘露零天無物不潤其承訓誨若時雨化者不可勝數矣至大金貞祐九年辛巳夏會訓下淸流」
說楞嚴經尤加勤勵忽一日顧謂衆曰正法難遇猶如龜木吾亦不久於世請諸尊宿母虛度光陰勉弘末法以稱佛意衆皆愕然至季夏示微恙沈綿寢深猶不輟講演」
至七月移居于公山念佛寺與元正靑林二禪老從容談道至八月二十有八日剃頭澡浴九月初二日喚侍側者更衣因坐繩床命唱梵侍者請臨終偈師擧目熟視曰」
這癡漢我平生曾不作一偈今作什麼偈耶因叩繩床三下而寂視之已化矣顔色不
變舉軆如生嗚呼達人之通觀也以死生同爲一体言笑自若無去來之想非有自」
證之力安能如是耶以十月十日門徒五十餘人奉靈輿茶毗于公山南麓明日拾靈骨移葬于神龜山立塔報齡五十一法臘二十有四 上聞訃震悼追贈國師贈諡」
曰圓眞門人以樹碑事聞于朝 上乃命臣松老撰辭臣以文職忝在樞近不可以學識淺薄爲辭乃據門徒所錄行狀强序而銘之曰
梵雄西現 法舸其東 區分宗趣 派別流通 輪轅異用 致遠一功 禪敎異門 證覺惟同 繄我圓眞 寔曰雙弘 心如止水 頓炤眞空 戒譬秋月」
夐出塵籠 法若春泉 利物無窮 攀鱗附翼 龍象門叢 口授心傳 玄關洞開 顯滅有時 隻履西廻 門從濟濟 香山其頹 請勒遺蹝 示厥後來
命撰受辛 濫及非才 敢拜稽首 矍然而哉 卓爾芳名 千載▨雷」
將仕郞大官署丞兼寶文閣校勘臣金孝印奉 宣書」
甲申五月 日 沙門 慧寂等 立石」
〔출전 : 『韓國金石全文』 中世下(1984)〕
원진국사(圓眞國師)비명(碑銘) [제액(題額)] 고려국(高麗國) 보경사주지(寶鏡寺住持) 대선사(大禪師) 증시원진국사 비명 병서(贈諡圓眞國師 碑銘 幷序) 통의대부(通議大夫) 추밀원(樞密院) 우부승선(右副承宣) 시국자감(試國子監) 대사성(大司成) 사자금어대(賜紫金魚袋) 신(臣) 이공로(李公老)가 왕명을 받들어 짓고, 장사랑(將仕郞) 대관서승(大官署丞) 겸(兼) 보문각(寶文閣)교감(校勘) 김효인(金孝印)은 교칙(敎勅)에 의하여 쓰다. 대저 일심(一心)이란 만법(萬法)의 총체이므로 육도(六度) 만행(萬行)이 이를 말미암아 생겨나지 않음이 없다. 그러나 성품(性品)에는 영리하고 아둔한 차이가 있으며, 혼미(昏迷)하고 깨달음이 같지 않으므로, 마치 때 묻은 헌옷 속에 보배를 달고 있으나, 알지 못함과 같으며, 혹자(或者)는 탁한 물 밑에 빠뜨린 보주(寶珠)를 찾으려 하나, 찾지 못하니, 이 이치를 미매(迷昧)한 자는 마치 땅속에 묻혀 있는 보물을 알지 못하는 것과 같다. (결락) 이와 같이 부처님께서 미혹한 중생(衆生)을 불쌍히 여기시고, 세상에 출현하시어 삼승(三乘)과 12분교(十二分敎)를 설하였으며, 혹은 비니(毗尼)로 신(身)·구(口)·의(意)를 섭호(攝護)하는 율장을 세웠고, 혹은 선나(禪那)로 진리의 세계를 증입(證入)하는 문(門)을 제시하되, 대개 중생(衆生)의 기근(機根)이 그 깊고 옅음이 같지 않음을 보여 주셨다. 이에 대하여 후대(後代)의 학자들이 각기 저마다 종취(宗趣)를 세우므로서 서로의 주장이 대립하고 모순되어 (결락) 깊이 공(空)과 유(有)에 국집하여 자신이 병들었음은 알지 못하고, 다른 종파(宗派)에게 사병(邪病)에 빠졌다고 비방하면서, 도도(滔滔)하게 자기의 주장은 모두가 옳다고 역설하는 실정이다. 그러나 공(空)과 유(有)를 양망(兩忘)하고, 선(禪)과 교(敎)를 쌍홍(雙弘)하여,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이는 오직 우리 원진국사(圓眞國師) 밖에 없지 않는가! 스님의 휘는 승형(承逈)이요, 자는 영회(永廻)이며, 속성은 신씨(申氏), 상락(上洛)의 산양(山陽)출신이다. 선대(先代)는 대대로 유가(儒家)이었다.아버지의 이름은 통한(通漢)이니, 이(以) (결락) 내급사(內給事)로 있다가 금성(錦城)군수(郡守)로 부임(赴任)하여 재임(在任) 중에 순직하였고,어머니도 또한 일찍 돌아가셨다. 그리하여 스님은 3살 때 고아(孤兒)가 되어 숙부(叔父)인 시어사(侍御史) 광한(光漢)에 의해서 국양(鞠養)되었다. 총명하고 영특하여 해포(孩抱)로부터 전혀 희완(戲翫)하는 일이 없었으며, 7살 때 운문사(雲門寺) 연실선사(淵實禪師)를 은사로 하여 스님이 되었다. 모든 언행(言行)과 거지(擧止)가 모두 다른 아이들과 달랐다. 그리하여 모든 사람들이 희세(希世)의 신동(神童)이라고 입을 모았다. 13살 적에 경상북도 문경군 가은면 원북리(院北里) 희양산(曦陽山) 봉암사(鳳嵓寺) 동순(洞純)스님을 은사로 하여 스님이 되었다. 다음 해 전라북도 김제군 금산사(金山寺) 계단(戒壇)에서 비구계(比丘戒)를 받았다. 이로부터 청정하고 엄격하게 계주(戒珠)를 지켜 법기(法器)를 크게 키웠다. 그리하여 동순(洞純)스님이 매우 애중(愛重)히 여겼다. 그러나 스님은 명교(名敎)를 좋아하지 아니하고, 교종(敎宗)을 벗어나 뜻을 고상(高尙)한 데 두어 운종(雲蹤)과 학태(鶴態)처럼 초연 자약(超然 自若)하여, (결락) 깊은 숲속에서 정진(精進)하려 하였으나, 그러나 늙은 동순(洞純)스님을 두고 훌쩍 떠날 수가 없었다. 정사년(丁巳年)봄 해마다 연례적(年例的)으로 개최하는 보제사(普濟寺) 담선법회(談禪法會)에 참석하고 있는 중, 순공(純公)이 입적하였다는 부고를 받고,장례식에 떠나기 전 시어사(侍御史)인 숙부(叔父)를 찾아가서 여쭙되, 인생은 마치 아침 이슬과 같고, 부귀는 또한 뜬 구름과 같아서, 저는 세상 살이가 마치 밀을 씹는 것과 같나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 스님께서 입적(入寂)하였으므로 곧 떠나서 나의 초지(初志)를 성취하리라 하고는, 석장(錫杖)을 짚고 곧바로 떠났다. 이때 명종(明宗)임금이 조회(朝會) 때 신하들로부터 스님의 도행(道行)이 고매하다는 보고를 듣고, 유사(有司)에게 조칙(詔勅)을 내려 스님의 도행을 초록(抄錄)하였으니, 이는 상례(常例)를 벗어난 조치인 것이다. 이 해 가을 종문(宗門)의 기숙(耆宿) 대덕(大德)스님들이 모두 강하게 권하므로, 광명사(廣明寺) 선불장(選佛場)에 나아가서 어려운 질문에 대답하니, 마치 공허(空虛)에 전하는 소리와 같으며, 유창하여 날아가는 듯한 변재(辯才)는 층암절벽(層岩絶壁)에서 떨어지는 물과 같아서 듣는 사람들이 감동하여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가 없었다.그리하여 선불장에 참석한 중사(中使)와 증관(證官)과 석덕(碩德)들이 모두 상(床)에서 내려 공손히 서서 경청하였으므로, 상상품(上上品) 승과(僧科)에 발탁되었다. 그러나 스님은 이미 명리(名利)에 대하여 전혀 마음에 개체(芥滯)함이 없고, 다만 두루 명산승지(名山勝地)를 순유(巡遊)코자 할 뿐이었다. 드디어 조계산(曹溪山)으로 가서 보조국사(普照國師)를 참방하고 법요(法要)를 물은 다음, 강원도 강릉군 오대산(五臺山)으로 가서 문수보살님 앞에서 예배기도(禮拜 祈禱)를 하고 명감(冥感)을 받았다. 이어 춘천(春川) 청평산(淸平山)으로 진락공(眞樂公)의 유적을 답사하면서 김부철(金富轍)이 지은문수사기(文殊寺記)를 살펴보니, 공(公)이 문인(門人)들에게 이르기를, 수능엄경(首楞嚴經)은 심종(心宗)을 증인(證印)한 것이므로, 불교의 진리를 발명(發明)함에 있어 중요한 내객(內客)이다라는 말을 보고, 크게 감동을 받았다. 드디어 문성암(聞性庵)에 주석(住錫)하면서 능엄경 10권을 모두 열람하고, 제상(諸相)이 환망(幻妄)임을 통달하고, 반면 자심(自心)이 강대무변(廣大無邊)함을 알고서야 비로소 능엄(楞嚴)의 묘지(妙旨)를 믿게 되었으니, 숙세(宿世)부터 선근(善根)을 심음이 있어 일찍이 큰 원(願)을 발(發)하여 자주 자주 불법(佛法)의 교리를 선양하되, 반드시 이 능엄경으로서 으뜸을 삼았으니, 능엄교법(楞嚴敎法)이 세상에 널리 성행하게 된 것이 스님으로부터 시작되었다. 태화(泰和) 8년 무진(戊辰)에 왕명으로 개골산(皆骨山) 유점사(楡岾寺)에 주지(住持)토록 하였다. 경오년(庚午年) 가을 당시 귀척(貴戚)들이 경기의 연법사(演法寺)에서 법회를 개설하고, 왕에게 주청(奏請)하여 스님을 법사(法師)로 모시기로 하고, 편지를 보내어 고청(固請)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경사(京師)로 나아갔다. 지금의 상국(相國)인 청하공(淸河公)이 문하(門下)의 잠리(簪履)수천 명을 데리고 나와 도성의 동쪽에 있는 곽주사(郭注寺)로 영접하되, 기꺼이 경개(傾盖)로 환대하고 구의(摳衣)의 예를 다하였으니, 마치 돌로써 물에 던짐에 문연(脗然)히 상합(相合)함과 같았다. 청하공(淸河公)은 이때부터 더욱 선풍(禪風)을 중(重)히 여겨 조계종의 법유(法乳)로 하여금 우리나라에 진작(振作)하는데 진력(盡力)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숙연(宿緣)의 소감(所感)이 아니겠는가? 강종 임금이 즉위한지 3년째 되던 해에(1213) 삼중대사(三重大師)의 법계를 비수(批受)케 함에 스님께서는 굳게 사양하여 피하고자 하였으나, 당시 진강공(晉康公)이 정승(政承)인 영상(領相)으로 있었고, 희종(熙宗) 임금도 스님에 대한 총애가 지극하였으므로 부득이(不得已) 비직(批職)을 받았다. 그리고 이 해 겨울에 임금께서 비전(秘殿)으로 스님을 초빙하여 선록(禪錄)을 점파(點破)함으로써 더욱 존경하게 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중사내시(中使內侍)대관서령(大官署令) 소경여(邵敬輿)를 보내어 스님이 주지(住持)하는 정사(精舍)를 중수하게 하였다. 이보다 앞서 스님께서 어느 때 풍악산(楓嶽山) 보덕굴(普德崛)에서 지낼 때, 특이(特異)한 꿈을 꾼 적이 있는데,지금에 미치고서야 그 꿈을 징험(徵驗)하게 되었다. 계유년(癸酉年)에 이르러 지금의 고종(高宗) 임금께서 천조(踐祚)하고 선왕(先王)인 강종의 뜻을 계승하여 2년 갑술(甲戌)에 곽주사(郭注寺)를 중수하여 낙성법회(落成法會)를 열어 선지(禪旨)를 크게 천양(闡揚)하고 선사(禪師)의 법계를 비수(批授)하였다.그리고 이 해 봄에 또 고종 임금이 스님을 비전(秘殿)으로 초청하여 상의직장(尙衣直長)동정(同正) 서치(徐稚)의 아들로써 자기 대신 삭발하여 스님이 되게 하였다. 다음 해 가을에 또 대선사(大禪師)의 법계를 비가(批加)하고, 조칙(詔勅)을 내려 동경(東京) 이내(理內)인 청하현(淸河縣) 보경사(寶鏡寺)에 주지(住持)토록 하였다. 이보다 앞서 청평산(淸平山) 문수사(文殊寺)와 설악산(雪嶽山) 한계사(寒溪寺)에 주지(住持)토록 명하였으나, 모두 고사(固辭)하고 취임하지 않았다. 지금 보경사의 주지를 맡은 것은 강권(强勸)에 의한 것이지, 결코 스님의 뜻은 아니었다. 운문산(雲門山)에 복안사(伏安寺)란 절이 있었는데, 항적(降賊)의 주장(主長)들이 연수(淵藪)에 모여 있던 구염(舊染)의 좋지 못한 형태가 아직까지 말끔히 정돈(整頓)되지 않아서, 당두(堂頭)와 노숙(老宿)스님들이 크게 염려하고 있었다. 이들을 새로운 생활의 길로 개도(開導)코자 하여 스님을 초청해서 특별히 법회(法會)를 열고, 육조단경(六祖壇經)을 강설하였더니, 군적(群賊)들이 모두 크게 감화를 받아 눈물을 흘리면서 다시는 흉폭한 짓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하였다. 이로부터 그 지방 일대(一帶)가 베개를 높이 베고 편안히 잠을 잘 수 있는 태평세상(太平世上)이 되었다. 경진년(庚辰年) 봄에 태상왕(太上王)인 강종이 넷째 아들에게 출가(出家)토록 명하여 손수 그의 머리를 깎아 주었으니, 지금의 진구사(珍丘寺) 주지(住持) 경지선사(鏡智禪師)가 바로 그 분이시다. 옛날 청도군(淸道郡) 칠엽사(七葉寺) 총림에 있을 때, 오랫동안 날이 가물어 정천(井泉)이 고갈하여 하늘을 쳐다보고 걱정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이때 스님께서 정심(淨心) 재계(齋戒)하고 장로자각(長蘆慈覺) 종이선사(宗頤禪師)가 설(說)한 바, 사갈라용왕(沙渴羅龍王)이 대해(大海)를 떠나지도 아니하고, 또한 용궁(龍宮)에서 나오지도 않는다는 기우법요식(祈雨法要式)을 담설(談說)하여 오직 중생을 위하는 일념(一念) 자비심(慈悲心)으로써 자비의 구름을 일으켜, 감로(甘露)의 비를 내려 주십사고 하는 말을 되풀이 하면서, 정근(精勤)하여 밤이 새도록 철야(徹夜)하였더니, 갑자기 호우(豪雨)가 쏟아졌다. 그리고 또 팔공산(八公山)염불난야(念佛蘭若)에 있을 때, 2·3명의 도반(道伴)과 함게 동봉(東峰)에 모여 차를 끓여 마시고 있었다. 이때에도 날이 크게 가물었다. 스님께서 이르기를 지금 비는 내리지 않고, 불볕 더위가 계속함은 재기(災氣)가 덮인 까닭이니, 말라가는 못자리가 타고 있는 농작물(農作物)을 어찌 그대로 보고만 있겠는가? 하고, 한 잔의 차(茶)를 바위 위에 올려 놓고 아라한(阿羅漢)님께 기도하되, 선월화상예참문(禪月和尙禮懺文)으로써 예식 도중 아직 범창(梵唱)이 끝나기도 전에 갑자기 단 비가 내려 전답(田畓)이 완전히 해갈(解渴)되었다. 대개 스님의 덕행(德行)으로 감응(感應)한 바가 많았으니, 이는 스님께서 전도(傳道)와 수업(授業)을 의무로 여겨 내면(內面)으로는 대묘(大妙)의 성기(城基)에 도달하였고, 밖으로는 무궁(無窮)한 중생들의 근기(根機)에 응하였다. 법등(法燈)을 끊임없이 전(傳)하고, 혹은 경(經)을 일러주되 마치 이 병의 물을 저 병으로 옮기는 것과 같이 하나도 누락(漏落)함이 없었다. 사방(四方)의 학자(學者)들이 산두(山斗)처럼 숭앙(崇仰)할 뿐만 아니라, 둥근 달이 바다를 비추니, 바다 물결이 밝지 않음이 없고, 감로(甘露)가 하늘에서 떨어지니, 만물(萬物)이 윤택(潤澤)을 받지 않음이 없는 것과 같았다. 그의 교훈(敎訓)을 받은 이는 마치 적시(適時)에 내려 주는 감우(甘雨)를 만남과 같이 희열을 느꼈다. 스님으로부터 교화(敎化)를 받은 사람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대금(大金) 정우(貞祐) 9년 신사(辛巳) 여름에 이르러 문하(門下)의 청류(淸流)를 모아 놓고, 열심히 능엄경(楞嚴經)을 가르쳤다. 그러던 중 어느날 갑자기 대중(大衆)들에게 이르시되, 정법(正法)을 만나기 어려움이 마치 귀목(龜木)과 같느니라. 나 또한 이 세상에 살아 있을 날이 얼마 남지 아니하였으니, 바라건대 여러 존숙(尊宿)스님들은 세월을 허송하지 말고 힘써 말세의 불법을 홍천(弘闡)하여 부처님의 뜻에 어긋나지 않도록 하라고 당부하였다. 대중들은 이 말을 듣고, 깜짝 놀라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 해 6월에 이르러 미양(微恙)를 보인 후, 병세가 점점 심면(沈綿)하고 침심(寢深)하였으나, 그래도 오히려 능엄경 강연(講演)을 중지하지 아니하였다. 7월 팔공산(八公山) 염불사(念佛寺)로 이석(移錫)하였다. 마지막으로 원정(元正)과 청림(靑林)등 두 선로(禪老)와 함께 종용(從容)히 도담(道談)을 나누었다. 8월 28일에 이르러 삭발하고, 목욕하였다. 9월 2일 시자(侍者)를 불러 옷을 갈아 입고, 단정히 승상(繩床)에 앉아 범패(梵唄)를 읊게 하였다. 이때 시자(侍者)가 스님께 임종게(臨終偈)를 청(請)하니, 스님은 눈을 뜨고 한참동안 노려 보고 이르시기를, 이 어리석은 놈아! 내가 평생동안 한 게송(偈頌)도 지은 적이 없는데, 이제 와서 무슨 게송을 지어달라는 말인가? 하시고, 승상(繩床)을 세 번 내리친 다음, 곧 적요(寂寥)하므로, 가까이 가서 보니 이미 입적하시었다. 그러나 안색(顔色)은 조금도 변하지 아니하여 온 몸이 마치 살아 있을 때와 같았다. 위대하신 지라! 진리를 통달(通達)한 사람은 사(死)와 생(生)을 일체(一體)로 보아 죽음에 당하여도 언소(言笑)가 자약(自若)하며, 사거(死去)와 생래(生來)의 생각이 없으니, 자증(自證)과 자오(自悟)의 법력(法力)이 아니면 어찌 능히 이와 같을 수 있겠는가? 10월 10일 문도(門徒) 50여명이 영여(靈輿)를 모시고 팔공산(八公山) 남쪽 기슭에서 화장(火葬)하였다. 다음 날 영골(靈骨)을 수습(收拾)하여 신구산(神龜山)으로 이장(移葬)하고 탑(塔)을 세웠다. 세수는 51이요, 법랍은 37(비문에 24는 오치(誤植)이다)세였다. 고종(高宗) 임금께서 부고를 듣고 크게 진도(震悼)하시면서 국사(國師)로 추증(追贈)하고, 시호를 원진(圓眞)이라 증정(贈呈)하였다. 문인(門人)들이 스님의 탑비(塔碑)를 세우고자 조정(朝廷)에 건의(建議)하였다. 그리하여 임금께서 신(臣) 공로(公老)에게 비문(碑文)을 지으라고 하명하였으나, 신(臣)은 그 동안 문직(文職)으로써 막중한 추근(樞近)의 위치에 있으면서 폐하(陛下)를 욕되게 하고 있을 뿐아니라, 학식(學識)이 천박(淺薄)하여 도저히 비문을 지을 수 없다고 굳게 사양하였으나, 하는 수 없이 문도(門徒)들이 기록한 행장(行狀) 자료에 의거하여 억지로 서술(序述)하고 명(銘)하여 가로되, 위대(偉大)하신 부처님 서천(西天)에 출현 그의 법(法) 동점(東漸)하여 동토(東土)에 왔다 교리(敎理)의 내용(內容)따라 종파(宗派)가 성립(成立) 그 많은 종파들이 천하(天下)에 유통(流通) ① 종파마다 종지(宗旨)는 비록 다르나 돌아가는 표적(標的)은 다르지 않네 선(禪)과 교(敎)가 방법은 같지 않지만 구경지(究竟地)인 성불(成佛)엔 다르지 않다 ② 위대하신 우리의 원진국사(圓眞國師)는 선(禪)과 교(敎) 차별없이 쌍홍(雙弘)하였다 청정(淸淨)하온 그 마음 지수(止水)와 같아 진리(眞理)의 그 세계(世界)를 두루 비추다 ③ 청정(淸淨)한 계(戒)의 광명(光明) 추월(秋月)과 같아 번잡한 중생세계(衆生世界) 초월(超越)하였다 홍대(弘大)하신 그 법력(法力) 춘천(春泉)과 같아 중생(衆生)을 이익(利益)함이 끝이 없도다 ④ 정정(錚錚)한 청풍납자(淸風衲子) 줄을 이어서 찾아든 용상(龍象)대덕(大德) 문(門)을 메우다 구수(口授)와 심전(心傳)으로 겸전(兼傳)하오니 조사관문(祖師關門) 훤하게 열려졌도다 ⑤ 태어나고 죽음은 때가 있는 법 후사(後事)를 당부하고 서회(西廻)하시니 수많은 제자(弟子)들이 어쩔줄 몰라 태산(泰山)이 무너지듯 넋을 잃었네 ⑥ 임금께 건의하여 비(碑)를 세워서 후세(後世)에 그 업적(業蹟)을 전(傳)하려 하여 절묘(絶妙)한 비문(碑文) 지으라는 그 명령(命令) 외람되이 신(臣)에게 내려졌도다 ⑦ 할수없이 선칙(宣勅)은 받자왔으나 확확(矍矍)히 뛰는 가슴 가눌 길 없네 탁월(卓越)하고 빛나는 그 이름이여 천만년(千萬年) 흘러가도 심금(心琴)을 치리 ⑧ 갑신년(甲申年) 5월 일 사문(沙門) 혜적(慧寂)등이 비석을 세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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