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각국사비명-김효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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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완식 작성일18-12-27 21:13 조회1,289회 댓글0건본문
高麗國曹溪山第二世故斷俗寺住持修禪社主贈諡眞覺國師碑銘幷序」
金紫光祿大夫守太保門下侍郎平章事修文殿大學士監修國史判禮部翰林
院事太子太保致仕臣李奎報奉 宣撰」
將仕郎中書舍人知 制誥太子司議郎 賜紫金魚袋臣金孝印奉 宣書」
夫自有心法已來凡衲子之鼻孔遼天者原其靈臺孰不欲與霜月爭潔耶然至於宗門之名品升降則有不能大忘情者於是有以此爲嫌遂深遁巖谷潜修心要切不欲嬰其名」
累而名自逼逐者孰是歟如我國師當之矣况自妙齡業已從事於文章未幾旋擢賢關則學非不精也命非不偶也若小忍須臾便登桂籍長驅前途不失爲名士大夫而反割弃」
垂就之名猶以不早落染爲恨其超然出世之心亦於此可驗求之松廣古蓋法融天然之比也 國師諱惠諶字永乙自號無衣子俗姓崔氏名寔羅州和順縣人也考諱琬鄕貢進」
士母裴氏夢天門豁開又夢被震者三因而有娠凡十有二月乃生焉其胞重纒又如荷袈裟狀及折兩目俱瞑經七日乃開每飮乳後輒轉身背母而臥父母恠之父早薨從母乞」
出家母不許勉令業儒然常念經持呪久乃得力喜毁斥淫巫妖祠或往往救人病有効承安六年辛酉擧司馬試中之是年入大學聞母病遂還鄕侍疾於族兄裴光漢家斂念入觀」
佛三昧母夢諸佛菩薩遍現四方覺而病愈裴氏夫婦亦同此夢明年母卽世時 普照國師在曹溪山新開修禪社道化方盛師徑造叅禮請營齋薦母因乞剃度 國師許之是夜」
阿舅夢 師之亡母升天始師之謁 國師也 國師見之以爲僧更見則非也先是國師夢雪竇顧禪師入院心異之明日師來叅由是益奇焉師甞居蜈山坐一磐石晝夜常」
習定每至五更唱偈甚厲聲聞十許里略不失時聞者以此候旦又居智異山金臺庵宴坐臺上雪積沒頂猶兀坐如枯株不動衆疑其死撼之不
其刻苦如此非夫與道凝精外」
生死遺形骸者孰至是哉乙丑秋 國師在億寶山師與禪者數人方往謁憇山上距庵千餘步遙聞 國師在庵中喚侍者聲作偈其略云呼兒響落松蘿霧煮茗香傳石徑風及」
叅禮擧似此話 國師頷之以手中扇授之 師呈偈曰昔在師翁手裏今來弟子掌中若遇熱忙狂走不妨打起淸風師益器之又一日隨 國師行 國師指一破鞋云鞋在這裏人在」
什麽處 答曰何不其時相見國師大悅又擧趙州狗子無佛性話因續擧大慧杲老十種病問之衆無對 師對曰三種病人方解斯旨 國師曰三種病人向什麽處出氣」
師以手打窓一下 國師呵呵大笑及歸方丈更密召與話乃嘉 曰吾旣得汝死無恨矣汝當以佛法自任不替本願也泰和戊辰欲命師嗣席卽退安圭峯 師固辭遂去智異」
山絕跡滅影者數載大安庚午 國師入寂門徒聞于上承勑繼住師不獲已入院開堂於是四方學者及道俗高人逸老雲奔影鶩無不臻赴社頗隘 康廟聞之命有司增構屢」
遣中使督役遂闢而廣之又遣使就賜滿繡袈裟磨衲各一領幷茶香寶甁因求法要 師撰心要以進今行于世自是公卿貴戚四岳邦伯聞風慕道或遙禮爲師或親趨下風者」
不可勝紀凡禪講之負氣屈强自謂莫己若者及一見莫不愕然改容猶師事之不暇也今門下侍中晋陽崔公聆師風韻傾渴不巳屢欲邀致 京輦師竟不至焉然千里相契宛」
如對面復遣二子叅侍凡 師之常住資具莫不盡力營辦至於茶香藥餌珍羞名菓及道具法服常以時餉遺連旦不絕 今上卽位 制授禪師又加大禪師其不經選席直登」
緇秩自 師始也叅政崔公洪胤於未相時嘗掌司馬試 師出其門下未幾公入相師住曹溪相國稱弟子願登名社裏以書致意其畧曰佛光樂與於白學士親授大乘嵩岳」
欣迎於賀秘書密傳妙旨 師答之其畧曰我昔居公門下公今入我社中互爲賓主換作師資聞者傳以爲勝事貞祐己卯詔住斷俗寺累辭不允明年入院然以本社爲常栖之」
所癸巳仲冬在本社示疾晋陽公聞之大驚遂聞于 上遣御醫某診視春徙處月燈寺麻谷入室 師曰老漢今日痛甚谷曰爲甚麼如此 國師以偈答 曰衆苦不到處別有」
一乾坤且問是何處大寂涅槃門 師竪起拳頭云遮箇拳頭也辭說禪汝等信否遂展掌云開則五指參差握拳云合則混成一塊開合自在一多無碍雖然如是未是拳頭」
本分說話怎生是本分說話卽以拳頭打窓一下呵呵大笑甲午六月二十六日 召門人囑事謂麻谷 曰老漢今日痛忙答曰未蕃噵什麼 師云老漢今日痛忙谷茫然 師微笑跏跌而化明日茶毗於月燈寺之北峯拾靈骨還本山 上聞之震悼贈諡眞覺國師乙未仲炎葬于廣原寺之北遂立浮圖上賜額曰圓炤之塔享壽五十七臘」
三十有二自師之示疾生緣處山石崩落又群雀滿洞飛鳴者十餘日嗚呼其異哉其平生冥感神異則有龜受戒蟾聽法慈烏合籌特牛跪途等事皆世所傳門徒所記又非」
儒者所說故於此不詳云 師性冲和碩實旣自儒之釋凡內外經書無不淹貫故至於談揚佛乘撰著偈頌則恢恢乎游刃有餘塊矣不如是安能迹不踐 京都而坐享一國」
所仰若是哉噫眞可謂禪門正眼肉身菩薩者歟嗣法禪老夢如亦法主也請逸庵居士鄭君奮草具行錄以立碑請於晋陽公公曰 和尙住世利人多矣樂石不可不立遂聞于上」
上命小臣爲之銘其詞曰」
微笑已後傳心者誰於我三韓 國師得之生荷袈裟其兆己奇果得正眼超視當時自見是性傳人曰辭不有傳法迷者何資上堂擧話亶亶其說舌是佛心心是佛舌默固自然」
談亦可悅身遁深巖名從何洩學者趂追雲蒸文下左右扣之應接靡暇曾不放我片時閑坐五敎來叅熏染般若列岳躬趨痛求入社 王公遙揖謂若親炙三十二臘膏液所及」
有許多人飽飫周洽法棟云摧萬眼同泉上甚哀悼玉色慘然贈終孔縟寵典靡
仍命小臣豊碑是鐫此山寧騫此石不遷」
(陰記)
銀靑光祿大夫尙書右僕射翰林學士臣崔 滋奉 宣撰」
修禪社道人臣 卓然」
奉 宣書」
浮屠况德行如 國師者宜事鐫鑱 用圖不杇是以」
上命李文順公撰碑銘時 方多故歷▨餘載未 遑▨▨今知樞密院」
志遠踐頭輪重刱而新之遂與國師高弟天英等規欲▨▨未於是寺以達晋陽公公聞于」
宣加撰述然以管麻補▨於錦障▨非愚▨▨更不容言彼▨葬時有一穗▨白▨▨出五色鮮明▨▨如▨
蓋于▨▨細雨聞」
承者與夫歆風師事者列之左旁其餘投名入社者不可▨▨師之生自天▨至于土庶馳誠追▨倚爲福利其沒也追念遺」
▨
三重 公卿大夫名号」
優婆夷」
洪慧 襄陽公 恕 樞密院使洪斯胤 諫議大夫金君綏」
戶部侍郎崔淳▨ 禮部員外郎宋公旦 延禧宮主王氏慈光」
▨神 晋陽公崔氏 樞密院使李沈▨ 諫議大夫劉俊公
戶部侍郎徐玕▨ ▨部員外郎▨▨▨ 金官國大夫人崔氏」
▨淸 廣陵侯 沔 樞密院使任景謙 殿中監李▨
將軍朴元▨ 禮部員外郎孫▨ 靜和宅主王氏」
大選 寧仁侯 稹 樞密院使孫▨ 判司宰事林景弼
將軍李唐柱 戶部員外郎▨崇 綏成宮主任氏」
維悅 守司空 禧 樞密院副使鄭畝 秘書監金孝印
將軍▨克▨ 戶部員外郎魏▨ 永安宮主鄭氏」
▨ 智彼 守司空 瑋 翰林學士任▨▨ 判大▨監▨▨▨
將軍李▨▨ 郎將▨▨▨ 河東郡夫人鄭氏」
▨ ▨諗 侍中崔宗峻 右僕射崔宗梓 大府卿▨▨
將軍▨▨▨ 郎將金玨 河東郡夫人鄭氏」
▨ 巨植 平章事崔洪胤 右僕射薛愼 衛尉卿崔和▨
將軍▨▨▨ 郎將蔡允禧 ▨稍郡夫人史氏」
▨▨ 守源 平章事朴文成 刑部尙書朴暄 秘書監丁▨▨
將軍▨元▨ 郎將盧玨」
▨▨ 全一 平章事金仲龜 判閣門事崔桂年 大卿宋謙▨
將軍▨▨▨ 郎將崔▨和 門人 ▨金 明藏」
支亮 大有 叅知政事鄭俶瞻 上將軍鄭存實 大卿朴允▨
將軍▨▨植 左正言吳▨▨ 正洲 宗▨」
僧統 叅知政事鄭邦甫 上將軍盧仁綏 大卿高▨擧」
御史中丞▨▨▨ 閣門祗侯崔宗輔 幹事立石」
處深比丘尼 叅知政事任景肅 判秘書省事趙脩 大將軍盧浚
軍器監▨▨ 閣門祗侯▨▨ 道者 宗然 龜夫」
禪師 ▨敏 知門下省事洪鈞 大司成劉冲祺 大將軍朴綏
司宰少卿金公亮 ▨▨居士李▨德 道者 守湛 宗禮」
洪許 淸遠 判兵部事金元義 判司宰事盧琯 大將軍鮮大有
禮部郎中白景瑄 領庵居士崔▨ 刊字」
財 ▨▨ 希遠 ▨僕射李世長 判司宰事田珣 大將軍蔡克平
禮部郎中安孝▨ 金剛居士▨▨▨ 庚戌四月日上石」
▨眞 首座 正心 左僕射奇泞 判衛尉事崔臣胤 大將軍洪承禹
禮部郎中▨洪鈞 居士盧泡孝」
▨英 壯機 判樞密院事鄭晏 左承宣鄭▨ 大將軍金光呂
戶部郎中徐▨ 錄事柳椿」
仁英 洪鈞 知樞密院事崔沆 禮賓卿蔡祥正 國子祭酒李藏用
中郎將金光 錄事朴允璋」
宗遠 ▨玄 樞密院使李允諴 禮賓卿崔于宣 吏部侍郎葛南成
左司諫▨▨ ▨第李克村」
▨▨ 克▨ 樞密院使朴文備 判少府監事李紘 禮部侍郎金公椊
左司諫閔光鈞 檢校少監裴允亮」
▨心 兩街僧錄皎▨ 樞密院使田甫龜 判司宰事任景珣 禮部侍郎閔迪鈞
左司諫魏敦謙 檢校將軍▨白▨」
靈巖郡副使管句學事閣 門祗侯李溱 立碑 差使員和昇平郡 副使閣門祗侯宋輿 道康郡監務衛尉注 簿宋寬 監役靈岩 郡吏▨國儉」
[출전 : 『韓國金石全文』中世下篇 (1984)]
고려국(高麗國) 조계산(曹溪山) 제2세(第二世) 고단속사(故斷俗寺) 주지(住持) 수선사주(修禪社主) 증시진각국사(贈諡眞覺國師) 비명(碑銘)과 아울러 서문(序文)
금자(金紫) 광록대부(光祿大夫) 수태보(守太保) 문하시랑(門下侍郞) 평장사(平章事) 수문전(修文殿) 대학사(大學士) 감수국사(監修國史) 판예부(判禮部) 한림원(翰林院) 사(事) 태자태보(太子太保) 치사(致仕) 신(臣) 이규보(李奎報)가 왕명(王命)을 받들어 짓고
장사랑(將仕郞) 중서(中書) 사인(舍人) 지제고(知制誥) 태자사(太子司)의랑(議郞)이며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받은 신(臣) 김효인(金孝印)은 왕명을 받들어 쓰다
대저 심법(心法)이 창립된 이후로부터 무릇 납자(衲子)로서 비공(鼻孔)으로 하늘을 흔드는 자들의 그 영대(靈臺)의 근원을 살펴보건대 감히 누가 상월(霜月)과 더불어 그 깨끗함을 겨루고자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심지어 종문(宗門)의 명품(名品)에 오르고 내림에 있어서는 능히 아무런 자취가 없도록 크게 망정(忘情)하지 못하는 실정이다. 이러한 현실을 못마땅하게 여겨 모든 것을 던져 버리고, 깊은 암곡(巖谷)에 은둔하여 조용히 마음을 닦아 간절한 마음으로 명루(名累)에 얽히지 않고자 하나, 이름 때문에 사방(四方)으로부터 찾아와 핍박함을 당하는 이가 어떤 사람인가! 바로 우리 진각국사(眞覺國師)가 그러한 분이시다. 묘령(妙齡)의 나이에 이미 학업을 마치고 문장(文章)에 종사하다가 얼마되지 않아 현관(賢關) 에 발탁되었으니, 학문(學問)은 정통하지 않음이 없고, 소명(召命)은 짝할 만한 자가 없었다. 만약 조금만 참았다면 문득 계적(桂籍)에 올라 길이 전도(前途)를 구가하면서, 이름난 사대부(士大夫)가 될 수 있는 기회(期會)를 잃지 않았을 것이나, 오히려 명리(名利)의 길로 나아가는 세속(世俗)의 영화는 마치 헌신짝 같이 던져 버렸다. 그리하여 다만 하루속히 출가하여 낙염(落染) 하고 스님이 되지 못한 것을 한탄하였으니, 그의 초연(超然)히 출속(出俗)하려는 마음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스님의 출가 동기와 같은 이를 옛 스님들 중에서 찾아보건대, 대개 우두법융선사(牛頭法融禪師)와 단하천연(丹霞天然)스님과 비교할 수 있다.
국사의 휘는 혜심(慧諶)이요 자(字)는 영을(永乙)이고 자호(自號)는 무의자(無衣子)이며, 속성(俗姓)은 최씨(崔氏)요 이름은 식(寔)이니, 나주(羅州) 화순현(和順縣) 출신이다. 아버지의 이름은 완(琬)으로 향공진사(鄕貢進士)이다. 어머니 배씨(裴氏)는 천문(天門)이 활짝 열리는 꿈을 꾸고 또 세 번이나 벼락을 맞는 태몽(胎夢)을 꾼 다음 임신하였다. 12개월만에 탄생하였는데, 포막(胞膜)이 겹겹으로 얽혀 마치 가사(袈裟)를 메고 있는 것과 같았다. 나자 마자 양쪽 눈을 함께 감고 있더니 7일 후에야 비로소 떴다. 항상 젖을 먹은 뒤에는 곧 몸을 돌이켜 어머니를 등지고 누웠으므로 부모가 이상하게 여겼다. 아버지가 일찍이 죽은 후, 어머님께 출가(出家)할 것을 애걸(哀乞)하였으나, 어머니는 끝내 허락하지 아니하고, 유학(儒學)을 힘써 배우도록 간곡히 부탁하였다. 그러나 스님은 항상 경전(經典)을 외우며 주문(呪文)(진언(眞言))을 송지(誦持)하여 얼마 후 가피력(加被力)을 입고는 음무(淫巫)와 요사(妖祠) 등 미신을 훼척(毁斥)하기를 좋아하였으며, 혹은 가끔 사람들의 병을 구제함에는 효험이 있었다. 승안(承安) 6년 신유(辛酉)에 사마시(司馬試) 에 응시하여 합격하였다. 그리고 또 이 해에 대학(大學)에 들어가 공부하다가, 어머니가 병환(病患)에 계신다는 소식을 듣고, 학업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족형(族兄)인 배광한(裴光漢)의 집에 어머니를 모시고 간병(看病)하면서 일념(一念)으로 관불삼매(觀佛三昧)에 들었더니 어머니의 꿈에 여러 불(佛)·보살(菩薩)님께서 사방(四方)으로부터 두루 나타나는 현몽(現夢)을 감득하고 꿈을 깨자 마자 병이 곧 나았다. 배씨(裴氏)의 부부도 또한 이와 같은 꿈을 꾸었다고 한다. 그 다음 해에 이르러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이 때 보조국사(普照國師)가 조계산(曹溪山)에서 수선사(修禪社)를 창설하여 선풍(禪風)을 크게 진작(振作)하고 있었다. 혜심은 곧 보조국사를 찾아가 참례하고, 재를 베풀어 어머님을 천도할 것을 청한 다음, 은사로 모시고 스님이 되고자 청하므로 보조국사가 곧 허락하였다. 이 날 밤 아구(阿舅)의 꿈에 혜심의 어머니가 하늘로 올라가는 꿈을 꾸었다. 처음에 혜심이 보조국사를 배알(拜謁)할 때 보조국사가 보고 스님이라고 생각하였으나, 다시 살펴보니 아니었다. 이보다 앞서 보조국사가 설두중현선백(雪竇重顯禪伯)이 사원(寺院)에 들어오는 꿈을 꾸고, 마음에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다음 날 진각국사가 내참(來參)하므로 더욱 기이(奇異)하게 여겼다.
스님이 일찍이 오산(蜈山)에 있을 적에, 한 반석(磐石)에 앉아서 밤낮으로 참선하다가 매양 오경(五更)에 이르러, 큰 소리로 게송(偈頌)을 읊으면 그 소리가 10여리까지 들렸는데, 매일같이 같은 시간에 읊었다. 그리하여 이 소리를 들은 사람들은 아침임을 짐작하였다고 한다. 또 지리산 금대암(金臺庵)에 있을 때, 대상(臺上)에서 참선하면 눈이 쌓여 이마를 덮어 보이지 않아, 마치 올좌(兀坐)한 고주(枯株)가 움직이지 않는 것과 같아서, 대중들이 그가 죽지 않았나 의심하고 흔들어 보았으나 전혀 반응이 없었다. 그의 각고정진(刻苦精進)이 이와 같았으니, 내면으로 도(道)와 더불어 일도응정(一到凝精)하였을 뿐만 아니라, 외형적으로도 육체를 마치 헌신처럼 던져버리고 생사(生死)를 초월하여 무애자재한 분이니, 누가 또 이러한 경지에 이르렀겠는가!
을축년(乙丑年)가을 보조국사가 억보산(億寶山)에 있을 적에 스님께서 선객(禪客) 몇 사람과 함께 친견하려 가던 도중 산상(山上)에서 쉬고 있었는데, 국사가 있는 암자(庵子)와의 거리는 1,000여 보(步) 쯤 되었다. 스님께서 국사가 암중(庵中)에서 시자(侍者)를 부르는 소리를 멀리서 듣고 게송(偈頌)을 지었으니, 그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시자를 부르는 소리, 송라(松蘿)의 안개 속에 떨어지니
차를 끓이는 진한 향기, 석풍(石風)을 타고 전하여 오네!
국사에게 참례할 때 앞에 다가가 이 게송(偈頌)을 고하니, 국사께서 고개를 끄덕이면서 손에 잡고 있던 부채를 건네 주었다. 스님께서 부채를 전해 받고 다음과 같은 게송(偈頌)을 바쳤다.
전에는 스승의 손에 있었으나
지금은 제자의 손에 있사오니
혹시나 무더움을 만나게 되면
청풍(淸風)을 일으킴도 무방하리라.
국사께서 이 게송을 보고 더욱 법기(法器)로 여기게 되었다. 또 어느 날 보조국사를 따라 가던 중, 국사께서 길가에 버려진 한 켤레의 떨어진 짚신을 보고 이르기를, “신발은 여기에 있건만 이 신을 신었던 사람은 어디에 있는가”라고 물었다. 스님께서 대답하기를 “어찌하여 스님께서 그 당시에 보시지 못하였습니까?”라고 했더니, 국사께서 크게 기꺼워하였다. 또한 조주(趙州)의 구자무불성(狗子無佛性)이란 화두(話頭)를 들어 보이고, 계속하여 대혜종고선사(大慧宗杲禪師)의 무자화(無字話)에 대한 간화선(看話禪)의 열 가지 병통(病痛)을 들어 질문하였으나, 대중은 아무도 대답하지 못하였는데, 오직 스님께서 대답하기를 “삼종병(三種病)을 가진 사람이어야 바야흐로 이 뜻을 알 수 있습니다”라고 했다. 국사가 이르기를 “그 삼종병인(三種病人)이 어디에서 숨을 쉬고 있는가?” 하니, 스님께서 손으로 창문을 한 번 내리치거늘, 국사께서 가가대소呵呵大笑)하고 방장실(方丈室)로 돌아가서 다시 몰래 스님을 불러 대화를 나누고 칭찬하기를 “내가 이미 자네를 만났으니, 나는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다. 너는 마땅히 불법(佛法)을 수호하는 것으로 스스로의 임무를 삼아 그 본원(本願)을 바꾸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하였다.
태화 무진년(泰和 戊辰年)에 보조국사가 혜심에게 수선사(修禪社)의 법도(法席)을 넘겨 주고, 자신은 규봉암(圭峯庵)으로 물러가 있으려 하였으나, 스님은 굳게 사양하고 지리산으로 들어가 자취를 끊고 그림자를 없앤 것이 여러 해였다. 대안 경오년(大安 庚午年)에 국사께서 입적(入寂)함에 따라, 문도들이 임금께 보고하여 왕명으로 국사의 자리를 잇게 하므로 하는 수 없어 입원(入院)하여 개당(開堂)하였다. 이로부터 사방의 학인(學人)과 도속(道俗)의 고인(高人) 및 일로(逸老)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어 찾아오지 않는 이가 없었다. 그리하여 수선사(修禪社)가 너무 비좁아서 대중들의 불편이 적지 않다는 사실을 전해 들으신 강종(康宗) 임금께서 유사(有司)에게 수선사의 증축(增築)을 명하여 공사를 시작하고, 여러 차례 중사(中使)를 보내 역사(役事)를 감독케 한 끝에 크게 확장하였다. 또 사신을 보내어 만수가사(滿繡袈裟)와 마납(磨衲) 각 1령(領) 및 차와 향(香)과 보병(寶甁) 등을 하사하고, 법요(法要)를 구하므로 스님께서 심요(心要)를 지어 올렸는데, 이 법문이 지금 세상에 유행하고 있다.
이로부터 공경대부(公卿大夫)의 귀척(貴戚)과 사악(四岳)의 방백(邦伯)들이 스님의 고매한 도덕을 듣고 흠모하여 혹은 멀리서 스승으로 모시기도 하고, 혹은 직접 하풍(下風)으로 찾아와 친견(親見)한 사람들을 일일이 다 기록할 수 없다. 모든 선사와 강사들의 부기(負氣)로 굴강(屈强)하여 자신을 대적할 자가 없다고 뽐내던 사람들도 스님을 한 번 만나기만 하면, 악연(愕然)히 놀라 얼굴 빛을 바꾸지 않는 이가 없었으며 스승으로 섬기기에 분주하였다. 지금의 문하시중(門下侍中)인 진양공(晋陽公) 최우(崔瑀)도 스님의 도풍(道風)을 듣고 흠모하고 갈앙(渴仰)한 끝에 여러 번 경련(京輦)인 개성으로 모시려 하였으나, 스님을 끝내 받아들이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千里나 되는 먼 거리에 있지만 서로의 의지가 계합(契合)함이 마치 서로 대면(對面)한 것과 같았다. 그리하여 최공(崔公)의 두 아들을 보내어 스님을 참례하고 모시도록 하였다. 뿐만 아니라 스님께 대중들의 수도(修道)에 필요한 상주물(常住物)·자구(資具) 등을 힘을 모아 마련하여 주지 않는 것이 없었으며, 심지어 다향(茶香)·약품(藥品)·진수(珍羞)·명과(名菓)·도구(道具)·법복(法服)에 이르기까지 하나도 부족함이 없이계속 제공하였다.
지금의 고종(高宗) 임금이 즉위(卽位)하여서는 선사(禪師)의 법계를 올리고, 또 대선사(大禪師)의 법계도 첨가(添加)하였으니, 선석(選席)에 응시하여 승과(僧科)를 치르지 않고 곧바로 치질(緇秩)에 등제된 것이 스님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참정(參政) 최홍윤(崔洪胤)이 재상(宰相)이 되기 전에 일찍이 사마시(司馬試)를 관장하였는데, 스님이 출가하기 전 그의 문하(門下)에서 나왔다. 그 후 얼마되지 않아 공(公)은 재상이 되고, 스님은 조계산의 제2세(第二世) 종주(宗主)가 되었다. 이때 상국(相國)이 제자로 자칭하면서 수선사의 용상방(龍象榜)인 대중명단(大衆名單)에 오르기를 희망하는 편지를 보냈다. 그 편지의 줄거리에 “불광여만(佛光如滿)선사는 항상 백학사(白學士)와 친하게 지내면서 직접 대승보살계를 주었으며, 숭악산(嵩岳山)의 도사(道士)는 기꺼이 하비서(賀秘書)를 영접하여 도교道敎)의 묘지(妙旨)를 비밀리에 전해 주었습니다”라고 했다. 편지를 받은 스님께서 요약하여 대답한 게송(偈頌)은 다음과 같다.
옛날에는 내가 공(公)의 문하(門下)에 있었건만
지금에는 공(公)이 나의 사중(社中)에 들어왔네!
석금(昔今)의 때에 따라 상호간(相互間) 빈주(賓主)가 되니
사제(師弟)의 그 위치 뒤바뀌어 일정치 않네!
이를 들은 사람들은 서로 전해가며 수승(殊勝)한 인연이라고 탄복하였다.
정우 기묘년(貞祐 己卯年)에 단속사(斷俗寺) 주지에 나아가도록 왕명(王命)이 내려져 여러 차례 사양하였으나 윤허(允許)하지 아니하여 부득이 다음 해에 취임하였다. 그러나 본사(本社)에서 상거(常居)하고 필요할 때에만 단속사에서 지냈다. 계사(癸巳)년 11월 수선사에서 병세를 보이게 되었다. 진양공(晋陽公)이 소식을 듣고 크게 놀랐다. 곧 임금께 보고하여 어의(御醫)를 보내서 진찰케 하였다. 다음 해인 1234년 봄 월등사(月燈寺)로 옮겼다. 그 때 주지인 마곡(麻谷)스님이 문병차 방에 들어가니, 스님께서 말하되 “노승(老僧)이 오늘 통증이 심하다”고 했다. 마곡(麻谷)이 이르기를 “무슨 까닭으로 이와 같이 아프십니까?” 하니, 국사께서 게송으로 대답하되
모든 고통 다가오지 못하는 곳에
상상 밖에 따로 한 건곤(乾坤) 있으니
그곳이 어디 있냐고 물어온다면
적정(寂靜)한 대열반(大涅槃)의 세계라 하리라
하였다. 스님께서 주먹을 들고 이르되 “이 주먹을 막아야 능히 선법(禪法)을 설할 줄 아나니, 너희들이 이를 믿는가” 하고, 드디어 손바닥을 편 다음 말하기를 “펴면 다섯 손가락이 참치(參差) 하리라” 하고, 다시 주먹을 움켜 쥐고 이르기를 “합하면 다섯 손가락이 하나가 되나니, 개합(開合)이 자재(自在)하며 일다(一多)가 무애(無礙)하느니라. 비록 이와 같으나, 아직 권두(拳頭)의 본분설화(本分說話)는 거양(擧揚)하지 아니하였으니, 어떤 것이 본분설화(本分說話)인가” 하고, 곧 주먹으로 창문을 한 번 내리치고 가가대소(呵呵大笑)하였다.
갑오(甲午)년6월 26일 문인(門人)들을 불러 후사(後事)를 당부하고 마곡(麻谷)에게 이르기를 “노한(老漢)이 오늘 몹시 바쁘다”고 하였다. 마곡이 대답하되 “무슨 뜻인지 알지 못하겠나이다” 하니, 스님께서 이르되 “노한(老漢)이 오늘 몹시 아프다”고 되풀이 하니, 마곡(麻谷)은 역시 무슨 뜻인지 몰라 멍멍하였다. 그리고나서 스님은 미소를 머금고 가부좌를 맺은 다음 조용히 입적(入寂)하였다. 다음 날 월등사(月燈寺) 북봉(北峯)에서 화장하고, 영골(靈骨)을 거두어 본산(本山)인 송광사로 돌아갔다. 임금께서 부고를 들으시고 크게 진도(震悼)하시어 진각국사(眞覺國師)라는 시호를 추증하였다. 을미(乙未)년 중염(仲炎)에 광원사(廣原寺)의 북쪽에 장사지내고, 드디어 부도(浮圖)를 세웠는데 임금께서 원소(圓炤)라는 탑호(塔號)를 내렸다. 세수는 57세요, 법랍은 32하였다. 스님께서 병세를 보일 때로부터 일생에 걸쳐 연고(緣故)가 있는 곳 에서 산석(山石)이 무너지며, 또 많은 새들이 동구(洞口)에 가득히 모여 슬피 울기를 10여 일 동안 계속하였으니, 오호라! 참으로 기이하도다. 스님께서 평생 동안 신이(神異)를 감득한 것으로는 거북이 수계(受戒)한 것, 두꺼비가 청법(聽法)한 것, 까마귀가 꽃을 물어온 것, 황소가 길에서 꿇어 앉은 등등의 사실은 세인(世人)들의 입으로 전하는 바이며, 문도(門徒)들이 기록한 바이다. 그러나 유자(儒者)가 설(說)할 바가 아니므로 여기에는 자세히 기록하지 않는다.
스님의 천성은 충화(冲和)하고 석실(碩實)하였다. 이미 유교로부터 불교에 이르기까지 무릇 내외의 모든 경서(經書)를 박통(博通)하지 않음이 없었다. 그러므로 심지어 불교를 천양(闡揚)할 때나, 저술과 게송(偈頌) 등을 지을 때 그 모두가 회회(恢恢)하며 유인유여(游刃有餘)하였다. 만약 이와 같지 않았다면 어찌 자취가 경도(京都)를 밟지 아니하고 시골 산중에 앉아서 거국(擧國) 상하(上下)가 모두 숭앙(崇仰)함이 이와 같을 수 있겠는가! 감탄하노라! 참으로 선문(禪門)의 정안(正眼)이며 육신보살(肉身菩薩)의 화현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스님의 법(法)을 이어 받은 몽여선로(夢如禪老)도 또한 법주(法主)이다. 일암거사(逸庵居士)인 정분(鄭奮)에게 청하여 스님의 행장(行狀)을 초록(草錄)케 하고, 입비(立碑)를 진양공(晋陽公)에게 청하였다. 공(公)이 말하기를 “화상(和尙)께서는 살아계셨던 일생 동안 국민을 이롭게 함이 지극히 많았으므로 악석(樂石)을 세우지 않을 수 없다” 하고, 곧 임금께 건의하였다. 왕이 이를 가납하시고 소신(小臣)에게 비문을 지으라고 명(命)하시므로 비명(碑銘)을 짓게 되었다. 이상의 비문 내용을 집약하여 명(銘)하여 가로되
영산(靈山)에서 염화미소(拈花微笑) 보인 이후로
정법안장(正法眼藏) 받은 스님 누구였던가!
우리나라 삼한(三韓) 중(中)에 전해온 다음
거룩하신 진각국사(眞覺國師) 얻었었도다. ①
태어날 때부터 가사를 메고 나와
기이(奇異)하온 그 징조(徵兆)로 앞날을 예측
출세간(出世間)에 뜻을 두어 세속(世俗)은 싫고
초연하게 발심(發心)하여 출가(出家)하였다. ②
번뇌속에 얽인 불성(佛性) 발견하고서
모든 이에 남김없이 전해주었네!
스님같은 선지식(善知識)이 없었더라면
미(迷)한 중생 의지할 곳 전혀 없도다 ③
조계산(曹溪山)의 수선사주(修禪社主) 계승하고서
후학(後學)들에 고구정녕(苦口叮嚀) 일러주시니
나의 짧은 삼촌설(三寸舌)이 그대로 불심(佛心)
내가 지닌 그 마음이 완전한 불성(佛性) ④
무설토(無舌土)가 불법(佛法)이요 불법칙자연(佛法則自然)
스님 법문 들은 이는 모두가 희열(喜悅)
번잡함은 싫어하고 산곡(山谷)에 숨어
감추려는 그 이름이 널리 퍼졌네 ⑤
사방에서 찾아드는 그 많은 학인(學人)
구름처럼 회상(會上)으로 모여들도다
주장자(柱杖子)를 지동지서(指東指西) 휘날리면서
학인제접(學人提接) 하느라고 쉴새가 없네! ⑥
아(我)를 찾는 그 화두(話頭)는 성성(惺惺)하오며
잠시라도 허송함은 전혀 없도다
오교산문(五敎山門) 학인(學人)들이 다투어 와서
반야지혜 닦기 위해 정진(精進)하도다 ⑦
열악(列岳)처럼 찾아드는 모든 학인(學人)이
수선사(修禪社)에 입방(入榜)코자 간청하도다
먼 곳서도 왕공귀인(王公貴人) 스님을 향해
합장하고 절하면서 친자(親炙)하려네! ⑧
각고정진(刻苦精進) 32년 닦으신 도덕
감로(甘露)같은 법우(法雨)로써 두루 뿌려서
매말랐던 마음밭에 보제수(菩提樹) 심어
무성하게 자라나서 결실(結實)시켰네! ⑨
거룩하신 법(法)의 기둥 부러졌으니
모든 사람 눈시울이 샘물과 같네
임금께서 들으시고 애도(哀悼)하시어
외외(巍巍)하던 그 용안(龍顔)이 참연(慘然)하도다 ⑩
진각(眞覺)이란 시호로써 추증했지만
추모의전(追慕儀典) 성대하나 반응이 없네!
비재천식(菲才淺識) 소신에게 선명(宣命)하시어
위대하신 업적 담아 비(碑)를 세우니
이 산천은 변천(變遷)하여 없어져서도
이 비석(碑石)은 영원토록 남아지이다
(陰記)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상서(尙書) 우복사(右僕射) 한림학사(翰林學士)인 신(臣) 최자(崔滋)가 왕명(王命)을 받들어 짓고 수선사(修禪社) 도인(道人) 신(臣) 탁연(卓然)이 교칙(敎勅)에 의(依)하여 쓰다
<음기(陰記)의 본문은 결락과 탈락이 많아 문맥이 연결되지 않으므로 번역을 생략함.>
…… 부도(浮屠) 항덕행여국사자(况德行如國師者) 의사전참(宜事鐫鑱) 용도불후(用圖不朽) 시이(是以) 상명이문순공(上命李文順公) 찬비명시(撰碑銘時) 방다고력(方多故歷) ▨여재미황▨▨금지추밀원(▨餘載未遑▨▨今知樞密院) …… 지원천두륜(志遠踐頭輪) 중창이신지(重刱而新之) 수여국사고제천영등(遂與國師高弟天英等) 규욕▨▨미어시사(規欲▨▨未於是寺) 이달진양공(以達晋陽公) 공문우(公聞于) …… 의가찬술(宜加撰述) 연(然) 이관마보▨어금장▨비우▨▨경불용언피▨장시(以管麻補▨於錦障▨非愚▨▨更不容言彼▨葬時) 유월수▨백▨▨출오색선명(有一穗▨白▨▨出五色鮮明) ▨▨여▨개우▨▨세우(▨▨如▨蓋于▨▨細雨) 문(聞) …… 승자여부흠풍사사자(承者與夫歆風師事者) 열지좌방(列之左旁) 기여투명입사자(其餘投名入社者) 불가▨▨(不可▨▨) 사지생자천
▨지우사서(師之生自天▨至于士庶) 치성추▨의위복리(馳誠追▨倚爲福利) 기몰야(其沒也) 추념유▨(追念遺▨)
▨재(▨財)
▨진(▨眞)
▨영(▨英)
인영(仁英)
종원(宗遠)
▨▨
▨심(▨心)
▨
▨
▨
▨▨
▨▨
지량(支亮)
승통(僧統) 처심(處深)
선사(禪師) 홍언(洪言)
▨▨
수좌(首座) 장기(壯機)
홍균(洪鈞)
▨현(▨玄)
극▨(克▨)
양가승록(兩街僧錄) 교▨(皎▨)
삼중(三重) 홍혜(洪慧)
▨신(▨神)
▨청(▨淸)
대선(大選) 추열(隹悅)
지척(智彳)
▨심(▨諗)
거식(巨植)
수원(守源)
전일(全一)
대유(大有)
비구니(比丘尼) ▨민(▨敏)
청원(淸遠)
희원(希遠)
정심(正心)
공경대부명호(公卿大夫名號)
양양공(襄陽公) 서(恕)
진양공(晋陽公) 최씨(崔氏)
광릉후(廣陵侯) 면(沔)
영인후(寧仁侯) 진(稹)
수사공(守司空) 희(禧)
수사공(守司空) 위(瑋)
시중(侍中) 최종준(崔宗俊)
평장사(平章事) 최홍윤(崔洪胤)
평장사(平章事) 박문성(朴文成)
평장사(平章事) 김중귀(金仲龜)
참지정사(參知政事) 정숙첨(鄭俶瞻)
참지정사(參知政事) 정방보(鄭邦輔)
참지정사(參知政事) 임경숙(任景肅)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 홍균(洪鈞)
판병부사(判兵部事) 김원의(金元義)
▨복사(▨僕射) 이세장(李世長)
좌복사(左僕射) 기저(奇泞)
판추밀원사(判樞密院使) 정안(鄭晏)
지추밀원사(判樞密院使) 최항(崔沆)
추밀원사(樞密院使) 이윤성(李允誠)
추밀원사(樞密院使) 박문비(朴文備)
추밀원사(樞密院使) 전보귀(田甫龜)
추밀원사(樞密院使) 홍사윤(洪斯胤)
추밀원사(樞密院使) 이수 ▨(李氵 ▨)
추밀원사(樞密院使) 임경겸(任景謙)
추밀원사(樞密院使) 손▨(孫▨)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 정무(鄭畝)
한림학사(翰林學士) 임▨▨(任▨▨)
우복사(右僕射) 최종재(崔宗梓)163)
우복사(右僕射) 설신(薛愼)
형부상서(刑部尙書) 박훤(朴暄)
판각문사(判閣門事) 최계년(崔桂年)
상장군(上將軍) 정존실(鄭存實)
상장군(上將軍) 노인수(盧仁綏)
판비서성사(判秘書省事) 조수(趙脩)
대사성(大司成) 유충기(劉冲祺)
판사재사(判司宰事) 노관(盧琯)
판사재사(判司宰事) 전순(田珣)
판위위사(判衛尉事) 최신윤(崔臣胤)
좌승선(左承宣) 정▨(鄭▨)
예빈경(禮賓卿) 채상정(蔡祥正)
예빈경(禮賓卿) 최우선(崔于宣)
판소부감사(判少府監事) 이굉(李紘)
판사재사(判司宰事) 임경순(任景珣)
간의대부(諫議大夫) 김군수(金君綏)
간의대부(諫議大夫) 유준공(劉俊公)
전중감(殿中監) 이▨(李▨)
판사재사(判司宰事) 임경필(任景弼)
비서감(秘書監) 김효인(金孝印)
판대▨감(判大▨監) ▨▨▨
대부경(大府卿) ▨▨
위위경(衛尉卿) 최화▨(崔和▨)
비서감(秘書監) 정▨▨(丁▨▨)
대경(大卿) 송겸▨(宋謙▨)
대경(大卿) 박윤▨(朴允▨)
대경(大卿) 고▨거(高▨擧)
대장군(大將軍) 노준(盧浚)
대장군(大將軍) 박수(朴綏)
대장군(大將軍) 선대유(鮮大有)
대장군(大將軍) 채극평(蔡克平)
대장군(大將軍) 홍승우(洪承禹)
대장군(大將軍) 김광려(金光呂)
국자제주(國子祭酒) 이장용(李藏用)
이부시랑(吏部侍郞) 갈남성(葛南成)
예부시랑(禮部侍郞) 김공졸(金公椊)
예부시랑(禮部侍郞) 민적균(閔迪鈞)
호부시랑(戶部侍郞) 최순▨(崔淳▨)
호부시랑(戶部侍郞) 서왕▨(徐王▨)
장군(將軍) 박원▨(朴元▨)
장군(將軍) 이당주(李唐柱)
장군(將軍) ▨극▨(▨克▨)
장군(將軍) 이▨▨(李▨▨)
장군(將軍) ▨▨▨
장군(將軍) ▨▨▨
장군(將軍) ▨원▨(▨元▨)
장군(將軍) ▨▨▨
장군(將軍) ▨▨식(▨▨植)
어사중승(御史中丞) ▨▨▨
군기감(軍器監) ▨▨
사재소경(司宰少卿) 김공량(金公亮)
예부랑중(禮部郞中) 백경선(白景瑄)
예부랑중(禮部郞中) 안효▨(安孝▨)
예부랑중(禮部郞中) ▨홍균(▨洪鈞)
호부랑중(戶部郞中) 서▨(徐▨)
중랑장(中郞將) 김광(金光)
좌사간(左司諫) ▨▨
좌사간(左司諫) 민광균(閔光鈞)
좌사간(左司諫) 위돈겸(魏敦謙)
예부원외랑(禮部員外郞) 송공단(宋公旦)
▨부원외랑(▨部員外郞) ▨▨▨
예부원외랑(禮部員外郞) 손▨(孫▨)
호부원외랑(戶部員外郞) ▨숭(▨崇)
호부원외랑(戶部員外郞) 위▨(魏▨)
낭장(郎將) ▨▨▨
낭장(郎將) 김왕(金王)
낭장(郎將) 채윤희(蔡允禧)
낭장(郎將) 노왕(盧王)
낭장(郎將) 최▨화(崔▨和)
각문지후(閣門祗侯) 최종보(崔宗輔)
각문지후(閣門祗侯) ▨▨
▨▨거사(▨▨居士) 이▨덕(李▨德)
혈암거사(頁庵居士) 최▨(崔▨)
금강거사(金剛居士) ▨▨▨
거사(居士) 노수효(盧氵 孝)
녹사(錄事) 유춘(柳椿)
녹사(錄事) 박윤장(朴允璋)
▨제(▨第) 이극촌(李克村)
검교소감(檢校少監) 배윤량(裴允亮)
검교장군(檢校將軍) ▨백▨(▨白▨)
우파이(優婆夷)
연희궁주(延禧宮主) 왕씨자광(王氏慈光)
금관국대부인(金官國大夫人) 최씨(崔氏)
정화택주(靜和宅主) 왕씨(王氏)
수성궁주(綏成宮主) 임씨(任氏)
영안궁주(永安宮主) 정씨(鄭氏)
하동군부인(河東郡夫人) 정씨(鄭氏)
하동군부인(河東郡夫人) 정씨(鄭氏)
▨초군부인(▨稍郡夫人) 사씨(史氏)
문인(門人)
▨금(▨金) 명장(明藏)
정수(正氵) 종▨(宗▨)
간사입석(幹事立石)
도자(道者) 종연(宗然) 귀 부(龜 夫)
도자(道者) 수담(守湛) 종례(宗禮)
간자(刊字)
경술(庚戌) 4월(四月) 일(日) 상석(上石)
영암군부사관구학사각문지후(靈巖郡副使管句學事閣門祗侯) 이주(李湊)
입비차사원지승평군부사각문지후(立碑差使員知昇平郡副使閣門祗侯) 송여(宋輿)
도강군감무위위주부(道康郡監務衛尉注簿) 송관(宋寬)
감역(監役) 영암군리(靈巖郡吏) ▨국검(▨國儉)
[출전 : 『校勘譯註 歷代高僧碑文』【高麗篇4】(1997)]
金紫光祿大夫守太保門下侍郎平章事修文殿大學士監修國史判禮部翰林
院事太子太保致仕臣李奎報奉 宣撰」
將仕郎中書舍人知 制誥太子司議郎 賜紫金魚袋臣金孝印奉 宣書」
夫自有心法已來凡衲子之鼻孔遼天者原其靈臺孰不欲與霜月爭潔耶然至於宗門之名品升降則有不能大忘情者於是有以此爲嫌遂深遁巖谷潜修心要切不欲嬰其名」
累而名自逼逐者孰是歟如我國師當之矣况自妙齡業已從事於文章未幾旋擢賢關則學非不精也命非不偶也若小忍須臾便登桂籍長驅前途不失爲名士大夫而反割弃」
垂就之名猶以不早落染爲恨其超然出世之心亦於此可驗求之松廣古蓋法融天然之比也 國師諱惠諶字永乙自號無衣子俗姓崔氏名寔羅州和順縣人也考諱琬鄕貢進」
士母裴氏夢天門豁開又夢被震者三因而有娠凡十有二月乃生焉其胞重纒又如荷袈裟狀及折兩目俱瞑經七日乃開每飮乳後輒轉身背母而臥父母恠之父早薨從母乞」
出家母不許勉令業儒然常念經持呪久乃得力喜毁斥淫巫妖祠或往往救人病有効承安六年辛酉擧司馬試中之是年入大學聞母病遂還鄕侍疾於族兄裴光漢家斂念入觀」
佛三昧母夢諸佛菩薩遍現四方覺而病愈裴氏夫婦亦同此夢明年母卽世時 普照國師在曹溪山新開修禪社道化方盛師徑造叅禮請營齋薦母因乞剃度 國師許之是夜」
阿舅夢 師之亡母升天始師之謁 國師也 國師見之以爲僧更見則非也先是國師夢雪竇顧禪師入院心異之明日師來叅由是益奇焉師甞居蜈山坐一磐石晝夜常」
習定每至五更唱偈甚厲聲聞十許里略不失時聞者以此候旦又居智異山金臺庵宴坐臺上雪積沒頂猶兀坐如枯株不動衆疑其死撼之不

生死遺形骸者孰至是哉乙丑秋 國師在億寶山師與禪者數人方往謁憇山上距庵千餘步遙聞 國師在庵中喚侍者聲作偈其略云呼兒響落松蘿霧煮茗香傳石徑風及」
叅禮擧似此話 國師頷之以手中扇授之 師呈偈曰昔在師翁手裏今來弟子掌中若遇熱忙狂走不妨打起淸風師益器之又一日隨 國師行 國師指一破鞋云鞋在這裏人在」
什麽處 答曰何不其時相見國師大悅又擧趙州狗子無佛性話因續擧大慧杲老十種病問之衆無對 師對曰三種病人方解斯旨 國師曰三種病人向什麽處出氣」
師以手打窓一下 國師呵呵大笑及歸方丈更密召與話乃嘉 曰吾旣得汝死無恨矣汝當以佛法自任不替本願也泰和戊辰欲命師嗣席卽退安圭峯 師固辭遂去智異」
山絕跡滅影者數載大安庚午 國師入寂門徒聞于上承勑繼住師不獲已入院開堂於是四方學者及道俗高人逸老雲奔影鶩無不臻赴社頗隘 康廟聞之命有司增構屢」
遣中使督役遂闢而廣之又遣使就賜滿繡袈裟磨衲各一領幷茶香寶甁因求法要 師撰心要以進今行于世自是公卿貴戚四岳邦伯聞風慕道或遙禮爲師或親趨下風者」
不可勝紀凡禪講之負氣屈强自謂莫己若者及一見莫不愕然改容猶師事之不暇也今門下侍中晋陽崔公聆師風韻傾渴不巳屢欲邀致 京輦師竟不至焉然千里相契宛」
如對面復遣二子叅侍凡 師之常住資具莫不盡力營辦至於茶香藥餌珍羞名菓及道具法服常以時餉遺連旦不絕 今上卽位 制授禪師又加大禪師其不經選席直登」
緇秩自 師始也叅政崔公洪胤於未相時嘗掌司馬試 師出其門下未幾公入相師住曹溪相國稱弟子願登名社裏以書致意其畧曰佛光樂與於白學士親授大乘嵩岳」
欣迎於賀秘書密傳妙旨 師答之其畧曰我昔居公門下公今入我社中互爲賓主換作師資聞者傳以爲勝事貞祐己卯詔住斷俗寺累辭不允明年入院然以本社爲常栖之」
所癸巳仲冬在本社示疾晋陽公聞之大驚遂聞于 上遣御醫某診視春徙處月燈寺麻谷入室 師曰老漢今日痛甚谷曰爲甚麼如此 國師以偈答 曰衆苦不到處別有」
一乾坤且問是何處大寂涅槃門 師竪起拳頭云遮箇拳頭也辭說禪汝等信否遂展掌云開則五指參差握拳云合則混成一塊開合自在一多無碍雖然如是未是拳頭」
本分說話怎生是本分說話卽以拳頭打窓一下呵呵大笑甲午六月二十六日 召門人囑事謂麻谷 曰老漢今日痛忙答曰未蕃噵什麼 師云老漢今日痛忙谷茫然 師微笑跏跌而化明日茶毗於月燈寺之北峯拾靈骨還本山 上聞之震悼贈諡眞覺國師乙未仲炎葬于廣原寺之北遂立浮圖上賜額曰圓炤之塔享壽五十七臘」
三十有二自師之示疾生緣處山石崩落又群雀滿洞飛鳴者十餘日嗚呼其異哉其平生冥感神異則有龜受戒蟾聽法慈烏合籌特牛跪途等事皆世所傳門徒所記又非」
儒者所說故於此不詳云 師性冲和碩實旣自儒之釋凡內外經書無不淹貫故至於談揚佛乘撰著偈頌則恢恢乎游刃有餘塊矣不如是安能迹不踐 京都而坐享一國」
所仰若是哉噫眞可謂禪門正眼肉身菩薩者歟嗣法禪老夢如亦法主也請逸庵居士鄭君奮草具行錄以立碑請於晋陽公公曰 和尙住世利人多矣樂石不可不立遂聞于上」
上命小臣爲之銘其詞曰」
微笑已後傳心者誰於我三韓 國師得之生荷袈裟其兆己奇果得正眼超視當時自見是性傳人曰辭不有傳法迷者何資上堂擧話亶亶其說舌是佛心心是佛舌默固自然」
談亦可悅身遁深巖名從何洩學者趂追雲蒸文下左右扣之應接靡暇曾不放我片時閑坐五敎來叅熏染般若列岳躬趨痛求入社 王公遙揖謂若親炙三十二臘膏液所及」
有許多人飽飫周洽法棟云摧萬眼同泉上甚哀悼玉色慘然贈終孔縟寵典靡

(陰記)
銀靑光祿大夫尙書右僕射翰林學士臣崔 滋奉 宣撰」
修禪社道人臣 卓然」
奉 宣書」
浮屠况德行如 國師者宜事鐫鑱 用圖不杇是以」
上命李文順公撰碑銘時 方多故歷▨餘載未 遑▨▨今知樞密院」
志遠踐頭輪重刱而新之遂與國師高弟天英等規欲▨▨未於是寺以達晋陽公公聞于」
宣加撰述然以管麻補▨於錦障▨非愚▨▨更不容言彼▨葬時有一穗▨白▨▨出五色鮮明▨▨如▨
蓋于▨▨細雨聞」
承者與夫歆風師事者列之左旁其餘投名入社者不可▨▨師之生自天▨至于土庶馳誠追▨倚爲福利其沒也追念遺」
▨
三重 公卿大夫名号」
優婆夷」
洪慧 襄陽公 恕 樞密院使洪斯胤 諫議大夫金君綏」
戶部侍郎崔淳▨ 禮部員外郎宋公旦 延禧宮主王氏慈光」
▨神 晋陽公崔氏 樞密院使李沈▨ 諫議大夫劉俊公
戶部侍郎徐玕▨ ▨部員外郎▨▨▨ 金官國大夫人崔氏」
▨淸 廣陵侯 沔 樞密院使任景謙 殿中監李▨
將軍朴元▨ 禮部員外郎孫▨ 靜和宅主王氏」
大選 寧仁侯 稹 樞密院使孫▨ 判司宰事林景弼
將軍李唐柱 戶部員外郎▨崇 綏成宮主任氏」
維悅 守司空 禧 樞密院副使鄭畝 秘書監金孝印
將軍▨克▨ 戶部員外郎魏▨ 永安宮主鄭氏」
▨ 智彼 守司空 瑋 翰林學士任▨▨ 判大▨監▨▨▨
將軍李▨▨ 郎將▨▨▨ 河東郡夫人鄭氏」
▨ ▨諗 侍中崔宗峻 右僕射崔宗梓 大府卿▨▨
將軍▨▨▨ 郎將金玨 河東郡夫人鄭氏」
▨ 巨植 平章事崔洪胤 右僕射薛愼 衛尉卿崔和▨
將軍▨▨▨ 郎將蔡允禧 ▨稍郡夫人史氏」
▨▨ 守源 平章事朴文成 刑部尙書朴暄 秘書監丁▨▨
將軍▨元▨ 郎將盧玨」
▨▨ 全一 平章事金仲龜 判閣門事崔桂年 大卿宋謙▨
將軍▨▨▨ 郎將崔▨和 門人 ▨金 明藏」
支亮 大有 叅知政事鄭俶瞻 上將軍鄭存實 大卿朴允▨
將軍▨▨植 左正言吳▨▨ 正洲 宗▨」
僧統 叅知政事鄭邦甫 上將軍盧仁綏 大卿高▨擧」
御史中丞▨▨▨ 閣門祗侯崔宗輔 幹事立石」
處深比丘尼 叅知政事任景肅 判秘書省事趙脩 大將軍盧浚
軍器監▨▨ 閣門祗侯▨▨ 道者 宗然 龜夫」
禪師 ▨敏 知門下省事洪鈞 大司成劉冲祺 大將軍朴綏
司宰少卿金公亮 ▨▨居士李▨德 道者 守湛 宗禮」
洪許 淸遠 判兵部事金元義 判司宰事盧琯 大將軍鮮大有
禮部郎中白景瑄 領庵居士崔▨ 刊字」
財 ▨▨ 希遠 ▨僕射李世長 判司宰事田珣 大將軍蔡克平
禮部郎中安孝▨ 金剛居士▨▨▨ 庚戌四月日上石」
▨眞 首座 正心 左僕射奇泞 判衛尉事崔臣胤 大將軍洪承禹
禮部郎中▨洪鈞 居士盧泡孝」
▨英 壯機 判樞密院事鄭晏 左承宣鄭▨ 大將軍金光呂
戶部郎中徐▨ 錄事柳椿」
仁英 洪鈞 知樞密院事崔沆 禮賓卿蔡祥正 國子祭酒李藏用
中郎將金光 錄事朴允璋」
宗遠 ▨玄 樞密院使李允諴 禮賓卿崔于宣 吏部侍郎葛南成
左司諫▨▨ ▨第李克村」
▨▨ 克▨ 樞密院使朴文備 判少府監事李紘 禮部侍郎金公椊
左司諫閔光鈞 檢校少監裴允亮」
▨心 兩街僧錄皎▨ 樞密院使田甫龜 判司宰事任景珣 禮部侍郎閔迪鈞
左司諫魏敦謙 檢校將軍▨白▨」
靈巖郡副使管句學事閣 門祗侯李溱 立碑 差使員和昇平郡 副使閣門祗侯宋輿 道康郡監務衛尉注 簿宋寬 監役靈岩 郡吏▨國儉」
[출전 : 『韓國金石全文』中世下篇 (1984)]
고려국(高麗國) 조계산(曹溪山) 제2세(第二世) 고단속사(故斷俗寺) 주지(住持) 수선사주(修禪社主) 증시진각국사(贈諡眞覺國師) 비명(碑銘)과 아울러 서문(序文)
금자(金紫) 광록대부(光祿大夫) 수태보(守太保) 문하시랑(門下侍郞) 평장사(平章事) 수문전(修文殿) 대학사(大學士) 감수국사(監修國史) 판예부(判禮部) 한림원(翰林院) 사(事) 태자태보(太子太保) 치사(致仕) 신(臣) 이규보(李奎報)가 왕명(王命)을 받들어 짓고
장사랑(將仕郞) 중서(中書) 사인(舍人) 지제고(知制誥) 태자사(太子司)의랑(議郞)이며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받은 신(臣) 김효인(金孝印)은 왕명을 받들어 쓰다
대저 심법(心法)이 창립된 이후로부터 무릇 납자(衲子)로서 비공(鼻孔)으로 하늘을 흔드는 자들의 그 영대(靈臺)의 근원을 살펴보건대 감히 누가 상월(霜月)과 더불어 그 깨끗함을 겨루고자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심지어 종문(宗門)의 명품(名品)에 오르고 내림에 있어서는 능히 아무런 자취가 없도록 크게 망정(忘情)하지 못하는 실정이다. 이러한 현실을 못마땅하게 여겨 모든 것을 던져 버리고, 깊은 암곡(巖谷)에 은둔하여 조용히 마음을 닦아 간절한 마음으로 명루(名累)에 얽히지 않고자 하나, 이름 때문에 사방(四方)으로부터 찾아와 핍박함을 당하는 이가 어떤 사람인가! 바로 우리 진각국사(眞覺國師)가 그러한 분이시다. 묘령(妙齡)의 나이에 이미 학업을 마치고 문장(文章)에 종사하다가 얼마되지 않아 현관(賢關) 에 발탁되었으니, 학문(學問)은 정통하지 않음이 없고, 소명(召命)은 짝할 만한 자가 없었다. 만약 조금만 참았다면 문득 계적(桂籍)에 올라 길이 전도(前途)를 구가하면서, 이름난 사대부(士大夫)가 될 수 있는 기회(期會)를 잃지 않았을 것이나, 오히려 명리(名利)의 길로 나아가는 세속(世俗)의 영화는 마치 헌신짝 같이 던져 버렸다. 그리하여 다만 하루속히 출가하여 낙염(落染) 하고 스님이 되지 못한 것을 한탄하였으니, 그의 초연(超然)히 출속(出俗)하려는 마음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스님의 출가 동기와 같은 이를 옛 스님들 중에서 찾아보건대, 대개 우두법융선사(牛頭法融禪師)와 단하천연(丹霞天然)스님과 비교할 수 있다.
국사의 휘는 혜심(慧諶)이요 자(字)는 영을(永乙)이고 자호(自號)는 무의자(無衣子)이며, 속성(俗姓)은 최씨(崔氏)요 이름은 식(寔)이니, 나주(羅州) 화순현(和順縣) 출신이다. 아버지의 이름은 완(琬)으로 향공진사(鄕貢進士)이다. 어머니 배씨(裴氏)는 천문(天門)이 활짝 열리는 꿈을 꾸고 또 세 번이나 벼락을 맞는 태몽(胎夢)을 꾼 다음 임신하였다. 12개월만에 탄생하였는데, 포막(胞膜)이 겹겹으로 얽혀 마치 가사(袈裟)를 메고 있는 것과 같았다. 나자 마자 양쪽 눈을 함께 감고 있더니 7일 후에야 비로소 떴다. 항상 젖을 먹은 뒤에는 곧 몸을 돌이켜 어머니를 등지고 누웠으므로 부모가 이상하게 여겼다. 아버지가 일찍이 죽은 후, 어머님께 출가(出家)할 것을 애걸(哀乞)하였으나, 어머니는 끝내 허락하지 아니하고, 유학(儒學)을 힘써 배우도록 간곡히 부탁하였다. 그러나 스님은 항상 경전(經典)을 외우며 주문(呪文)(진언(眞言))을 송지(誦持)하여 얼마 후 가피력(加被力)을 입고는 음무(淫巫)와 요사(妖祠) 등 미신을 훼척(毁斥)하기를 좋아하였으며, 혹은 가끔 사람들의 병을 구제함에는 효험이 있었다. 승안(承安) 6년 신유(辛酉)에 사마시(司馬試) 에 응시하여 합격하였다. 그리고 또 이 해에 대학(大學)에 들어가 공부하다가, 어머니가 병환(病患)에 계신다는 소식을 듣고, 학업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족형(族兄)인 배광한(裴光漢)의 집에 어머니를 모시고 간병(看病)하면서 일념(一念)으로 관불삼매(觀佛三昧)에 들었더니 어머니의 꿈에 여러 불(佛)·보살(菩薩)님께서 사방(四方)으로부터 두루 나타나는 현몽(現夢)을 감득하고 꿈을 깨자 마자 병이 곧 나았다. 배씨(裴氏)의 부부도 또한 이와 같은 꿈을 꾸었다고 한다. 그 다음 해에 이르러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이 때 보조국사(普照國師)가 조계산(曹溪山)에서 수선사(修禪社)를 창설하여 선풍(禪風)을 크게 진작(振作)하고 있었다. 혜심은 곧 보조국사를 찾아가 참례하고, 재를 베풀어 어머님을 천도할 것을 청한 다음, 은사로 모시고 스님이 되고자 청하므로 보조국사가 곧 허락하였다. 이 날 밤 아구(阿舅)의 꿈에 혜심의 어머니가 하늘로 올라가는 꿈을 꾸었다. 처음에 혜심이 보조국사를 배알(拜謁)할 때 보조국사가 보고 스님이라고 생각하였으나, 다시 살펴보니 아니었다. 이보다 앞서 보조국사가 설두중현선백(雪竇重顯禪伯)이 사원(寺院)에 들어오는 꿈을 꾸고, 마음에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다음 날 진각국사가 내참(來參)하므로 더욱 기이(奇異)하게 여겼다.
스님이 일찍이 오산(蜈山)에 있을 적에, 한 반석(磐石)에 앉아서 밤낮으로 참선하다가 매양 오경(五更)에 이르러, 큰 소리로 게송(偈頌)을 읊으면 그 소리가 10여리까지 들렸는데, 매일같이 같은 시간에 읊었다. 그리하여 이 소리를 들은 사람들은 아침임을 짐작하였다고 한다. 또 지리산 금대암(金臺庵)에 있을 때, 대상(臺上)에서 참선하면 눈이 쌓여 이마를 덮어 보이지 않아, 마치 올좌(兀坐)한 고주(枯株)가 움직이지 않는 것과 같아서, 대중들이 그가 죽지 않았나 의심하고 흔들어 보았으나 전혀 반응이 없었다. 그의 각고정진(刻苦精進)이 이와 같았으니, 내면으로 도(道)와 더불어 일도응정(一到凝精)하였을 뿐만 아니라, 외형적으로도 육체를 마치 헌신처럼 던져버리고 생사(生死)를 초월하여 무애자재한 분이니, 누가 또 이러한 경지에 이르렀겠는가!
을축년(乙丑年)가을 보조국사가 억보산(億寶山)에 있을 적에 스님께서 선객(禪客) 몇 사람과 함께 친견하려 가던 도중 산상(山上)에서 쉬고 있었는데, 국사가 있는 암자(庵子)와의 거리는 1,000여 보(步) 쯤 되었다. 스님께서 국사가 암중(庵中)에서 시자(侍者)를 부르는 소리를 멀리서 듣고 게송(偈頌)을 지었으니, 그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시자를 부르는 소리, 송라(松蘿)의 안개 속에 떨어지니
차를 끓이는 진한 향기, 석풍(石風)을 타고 전하여 오네!
국사에게 참례할 때 앞에 다가가 이 게송(偈頌)을 고하니, 국사께서 고개를 끄덕이면서 손에 잡고 있던 부채를 건네 주었다. 스님께서 부채를 전해 받고 다음과 같은 게송(偈頌)을 바쳤다.
전에는 스승의 손에 있었으나
지금은 제자의 손에 있사오니
혹시나 무더움을 만나게 되면
청풍(淸風)을 일으킴도 무방하리라.
국사께서 이 게송을 보고 더욱 법기(法器)로 여기게 되었다. 또 어느 날 보조국사를 따라 가던 중, 국사께서 길가에 버려진 한 켤레의 떨어진 짚신을 보고 이르기를, “신발은 여기에 있건만 이 신을 신었던 사람은 어디에 있는가”라고 물었다. 스님께서 대답하기를 “어찌하여 스님께서 그 당시에 보시지 못하였습니까?”라고 했더니, 국사께서 크게 기꺼워하였다. 또한 조주(趙州)의 구자무불성(狗子無佛性)이란 화두(話頭)를 들어 보이고, 계속하여 대혜종고선사(大慧宗杲禪師)의 무자화(無字話)에 대한 간화선(看話禪)의 열 가지 병통(病痛)을 들어 질문하였으나, 대중은 아무도 대답하지 못하였는데, 오직 스님께서 대답하기를 “삼종병(三種病)을 가진 사람이어야 바야흐로 이 뜻을 알 수 있습니다”라고 했다. 국사가 이르기를 “그 삼종병인(三種病人)이 어디에서 숨을 쉬고 있는가?” 하니, 스님께서 손으로 창문을 한 번 내리치거늘, 국사께서 가가대소呵呵大笑)하고 방장실(方丈室)로 돌아가서 다시 몰래 스님을 불러 대화를 나누고 칭찬하기를 “내가 이미 자네를 만났으니, 나는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다. 너는 마땅히 불법(佛法)을 수호하는 것으로 스스로의 임무를 삼아 그 본원(本願)을 바꾸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하였다.
태화 무진년(泰和 戊辰年)에 보조국사가 혜심에게 수선사(修禪社)의 법도(法席)을 넘겨 주고, 자신은 규봉암(圭峯庵)으로 물러가 있으려 하였으나, 스님은 굳게 사양하고 지리산으로 들어가 자취를 끊고 그림자를 없앤 것이 여러 해였다. 대안 경오년(大安 庚午年)에 국사께서 입적(入寂)함에 따라, 문도들이 임금께 보고하여 왕명으로 국사의 자리를 잇게 하므로 하는 수 없어 입원(入院)하여 개당(開堂)하였다. 이로부터 사방의 학인(學人)과 도속(道俗)의 고인(高人) 및 일로(逸老)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어 찾아오지 않는 이가 없었다. 그리하여 수선사(修禪社)가 너무 비좁아서 대중들의 불편이 적지 않다는 사실을 전해 들으신 강종(康宗) 임금께서 유사(有司)에게 수선사의 증축(增築)을 명하여 공사를 시작하고, 여러 차례 중사(中使)를 보내 역사(役事)를 감독케 한 끝에 크게 확장하였다. 또 사신을 보내어 만수가사(滿繡袈裟)와 마납(磨衲) 각 1령(領) 및 차와 향(香)과 보병(寶甁) 등을 하사하고, 법요(法要)를 구하므로 스님께서 심요(心要)를 지어 올렸는데, 이 법문이 지금 세상에 유행하고 있다.
이로부터 공경대부(公卿大夫)의 귀척(貴戚)과 사악(四岳)의 방백(邦伯)들이 스님의 고매한 도덕을 듣고 흠모하여 혹은 멀리서 스승으로 모시기도 하고, 혹은 직접 하풍(下風)으로 찾아와 친견(親見)한 사람들을 일일이 다 기록할 수 없다. 모든 선사와 강사들의 부기(負氣)로 굴강(屈强)하여 자신을 대적할 자가 없다고 뽐내던 사람들도 스님을 한 번 만나기만 하면, 악연(愕然)히 놀라 얼굴 빛을 바꾸지 않는 이가 없었으며 스승으로 섬기기에 분주하였다. 지금의 문하시중(門下侍中)인 진양공(晋陽公) 최우(崔瑀)도 스님의 도풍(道風)을 듣고 흠모하고 갈앙(渴仰)한 끝에 여러 번 경련(京輦)인 개성으로 모시려 하였으나, 스님을 끝내 받아들이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千里나 되는 먼 거리에 있지만 서로의 의지가 계합(契合)함이 마치 서로 대면(對面)한 것과 같았다. 그리하여 최공(崔公)의 두 아들을 보내어 스님을 참례하고 모시도록 하였다. 뿐만 아니라 스님께 대중들의 수도(修道)에 필요한 상주물(常住物)·자구(資具) 등을 힘을 모아 마련하여 주지 않는 것이 없었으며, 심지어 다향(茶香)·약품(藥品)·진수(珍羞)·명과(名菓)·도구(道具)·법복(法服)에 이르기까지 하나도 부족함이 없이계속 제공하였다.
지금의 고종(高宗) 임금이 즉위(卽位)하여서는 선사(禪師)의 법계를 올리고, 또 대선사(大禪師)의 법계도 첨가(添加)하였으니, 선석(選席)에 응시하여 승과(僧科)를 치르지 않고 곧바로 치질(緇秩)에 등제된 것이 스님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참정(參政) 최홍윤(崔洪胤)이 재상(宰相)이 되기 전에 일찍이 사마시(司馬試)를 관장하였는데, 스님이 출가하기 전 그의 문하(門下)에서 나왔다. 그 후 얼마되지 않아 공(公)은 재상이 되고, 스님은 조계산의 제2세(第二世) 종주(宗主)가 되었다. 이때 상국(相國)이 제자로 자칭하면서 수선사의 용상방(龍象榜)인 대중명단(大衆名單)에 오르기를 희망하는 편지를 보냈다. 그 편지의 줄거리에 “불광여만(佛光如滿)선사는 항상 백학사(白學士)와 친하게 지내면서 직접 대승보살계를 주었으며, 숭악산(嵩岳山)의 도사(道士)는 기꺼이 하비서(賀秘書)를 영접하여 도교道敎)의 묘지(妙旨)를 비밀리에 전해 주었습니다”라고 했다. 편지를 받은 스님께서 요약하여 대답한 게송(偈頌)은 다음과 같다.
옛날에는 내가 공(公)의 문하(門下)에 있었건만
지금에는 공(公)이 나의 사중(社中)에 들어왔네!
석금(昔今)의 때에 따라 상호간(相互間) 빈주(賓主)가 되니
사제(師弟)의 그 위치 뒤바뀌어 일정치 않네!
이를 들은 사람들은 서로 전해가며 수승(殊勝)한 인연이라고 탄복하였다.
정우 기묘년(貞祐 己卯年)에 단속사(斷俗寺) 주지에 나아가도록 왕명(王命)이 내려져 여러 차례 사양하였으나 윤허(允許)하지 아니하여 부득이 다음 해에 취임하였다. 그러나 본사(本社)에서 상거(常居)하고 필요할 때에만 단속사에서 지냈다. 계사(癸巳)년 11월 수선사에서 병세를 보이게 되었다. 진양공(晋陽公)이 소식을 듣고 크게 놀랐다. 곧 임금께 보고하여 어의(御醫)를 보내서 진찰케 하였다. 다음 해인 1234년 봄 월등사(月燈寺)로 옮겼다. 그 때 주지인 마곡(麻谷)스님이 문병차 방에 들어가니, 스님께서 말하되 “노승(老僧)이 오늘 통증이 심하다”고 했다. 마곡(麻谷)이 이르기를 “무슨 까닭으로 이와 같이 아프십니까?” 하니, 국사께서 게송으로 대답하되
모든 고통 다가오지 못하는 곳에
상상 밖에 따로 한 건곤(乾坤) 있으니
그곳이 어디 있냐고 물어온다면
적정(寂靜)한 대열반(大涅槃)의 세계라 하리라
하였다. 스님께서 주먹을 들고 이르되 “이 주먹을 막아야 능히 선법(禪法)을 설할 줄 아나니, 너희들이 이를 믿는가” 하고, 드디어 손바닥을 편 다음 말하기를 “펴면 다섯 손가락이 참치(參差) 하리라” 하고, 다시 주먹을 움켜 쥐고 이르기를 “합하면 다섯 손가락이 하나가 되나니, 개합(開合)이 자재(自在)하며 일다(一多)가 무애(無礙)하느니라. 비록 이와 같으나, 아직 권두(拳頭)의 본분설화(本分說話)는 거양(擧揚)하지 아니하였으니, 어떤 것이 본분설화(本分說話)인가” 하고, 곧 주먹으로 창문을 한 번 내리치고 가가대소(呵呵大笑)하였다.
갑오(甲午)년6월 26일 문인(門人)들을 불러 후사(後事)를 당부하고 마곡(麻谷)에게 이르기를 “노한(老漢)이 오늘 몹시 바쁘다”고 하였다. 마곡이 대답하되 “무슨 뜻인지 알지 못하겠나이다” 하니, 스님께서 이르되 “노한(老漢)이 오늘 몹시 아프다”고 되풀이 하니, 마곡(麻谷)은 역시 무슨 뜻인지 몰라 멍멍하였다. 그리고나서 스님은 미소를 머금고 가부좌를 맺은 다음 조용히 입적(入寂)하였다. 다음 날 월등사(月燈寺) 북봉(北峯)에서 화장하고, 영골(靈骨)을 거두어 본산(本山)인 송광사로 돌아갔다. 임금께서 부고를 들으시고 크게 진도(震悼)하시어 진각국사(眞覺國師)라는 시호를 추증하였다. 을미(乙未)년 중염(仲炎)에 광원사(廣原寺)의 북쪽에 장사지내고, 드디어 부도(浮圖)를 세웠는데 임금께서 원소(圓炤)라는 탑호(塔號)를 내렸다. 세수는 57세요, 법랍은 32하였다. 스님께서 병세를 보일 때로부터 일생에 걸쳐 연고(緣故)가 있는 곳 에서 산석(山石)이 무너지며, 또 많은 새들이 동구(洞口)에 가득히 모여 슬피 울기를 10여 일 동안 계속하였으니, 오호라! 참으로 기이하도다. 스님께서 평생 동안 신이(神異)를 감득한 것으로는 거북이 수계(受戒)한 것, 두꺼비가 청법(聽法)한 것, 까마귀가 꽃을 물어온 것, 황소가 길에서 꿇어 앉은 등등의 사실은 세인(世人)들의 입으로 전하는 바이며, 문도(門徒)들이 기록한 바이다. 그러나 유자(儒者)가 설(說)할 바가 아니므로 여기에는 자세히 기록하지 않는다.
스님의 천성은 충화(冲和)하고 석실(碩實)하였다. 이미 유교로부터 불교에 이르기까지 무릇 내외의 모든 경서(經書)를 박통(博通)하지 않음이 없었다. 그러므로 심지어 불교를 천양(闡揚)할 때나, 저술과 게송(偈頌) 등을 지을 때 그 모두가 회회(恢恢)하며 유인유여(游刃有餘)하였다. 만약 이와 같지 않았다면 어찌 자취가 경도(京都)를 밟지 아니하고 시골 산중에 앉아서 거국(擧國) 상하(上下)가 모두 숭앙(崇仰)함이 이와 같을 수 있겠는가! 감탄하노라! 참으로 선문(禪門)의 정안(正眼)이며 육신보살(肉身菩薩)의 화현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스님의 법(法)을 이어 받은 몽여선로(夢如禪老)도 또한 법주(法主)이다. 일암거사(逸庵居士)인 정분(鄭奮)에게 청하여 스님의 행장(行狀)을 초록(草錄)케 하고, 입비(立碑)를 진양공(晋陽公)에게 청하였다. 공(公)이 말하기를 “화상(和尙)께서는 살아계셨던 일생 동안 국민을 이롭게 함이 지극히 많았으므로 악석(樂石)을 세우지 않을 수 없다” 하고, 곧 임금께 건의하였다. 왕이 이를 가납하시고 소신(小臣)에게 비문을 지으라고 명(命)하시므로 비명(碑銘)을 짓게 되었다. 이상의 비문 내용을 집약하여 명(銘)하여 가로되
영산(靈山)에서 염화미소(拈花微笑) 보인 이후로
정법안장(正法眼藏) 받은 스님 누구였던가!
우리나라 삼한(三韓) 중(中)에 전해온 다음
거룩하신 진각국사(眞覺國師) 얻었었도다. ①
태어날 때부터 가사를 메고 나와
기이(奇異)하온 그 징조(徵兆)로 앞날을 예측
출세간(出世間)에 뜻을 두어 세속(世俗)은 싫고
초연하게 발심(發心)하여 출가(出家)하였다. ②
번뇌속에 얽인 불성(佛性) 발견하고서
모든 이에 남김없이 전해주었네!
스님같은 선지식(善知識)이 없었더라면
미(迷)한 중생 의지할 곳 전혀 없도다 ③
조계산(曹溪山)의 수선사주(修禪社主) 계승하고서
후학(後學)들에 고구정녕(苦口叮嚀) 일러주시니
나의 짧은 삼촌설(三寸舌)이 그대로 불심(佛心)
내가 지닌 그 마음이 완전한 불성(佛性) ④
무설토(無舌土)가 불법(佛法)이요 불법칙자연(佛法則自然)
스님 법문 들은 이는 모두가 희열(喜悅)
번잡함은 싫어하고 산곡(山谷)에 숨어
감추려는 그 이름이 널리 퍼졌네 ⑤
사방에서 찾아드는 그 많은 학인(學人)
구름처럼 회상(會上)으로 모여들도다
주장자(柱杖子)를 지동지서(指東指西) 휘날리면서
학인제접(學人提接) 하느라고 쉴새가 없네! ⑥
아(我)를 찾는 그 화두(話頭)는 성성(惺惺)하오며
잠시라도 허송함은 전혀 없도다
오교산문(五敎山門) 학인(學人)들이 다투어 와서
반야지혜 닦기 위해 정진(精進)하도다 ⑦
열악(列岳)처럼 찾아드는 모든 학인(學人)이
수선사(修禪社)에 입방(入榜)코자 간청하도다
먼 곳서도 왕공귀인(王公貴人) 스님을 향해
합장하고 절하면서 친자(親炙)하려네! ⑧
각고정진(刻苦精進) 32년 닦으신 도덕
감로(甘露)같은 법우(法雨)로써 두루 뿌려서
매말랐던 마음밭에 보제수(菩提樹) 심어
무성하게 자라나서 결실(結實)시켰네! ⑨
거룩하신 법(法)의 기둥 부러졌으니
모든 사람 눈시울이 샘물과 같네
임금께서 들으시고 애도(哀悼)하시어
외외(巍巍)하던 그 용안(龍顔)이 참연(慘然)하도다 ⑩
진각(眞覺)이란 시호로써 추증했지만
추모의전(追慕儀典) 성대하나 반응이 없네!
비재천식(菲才淺識) 소신에게 선명(宣命)하시어
위대하신 업적 담아 비(碑)를 세우니
이 산천은 변천(變遷)하여 없어져서도
이 비석(碑石)은 영원토록 남아지이다
(陰記)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상서(尙書) 우복사(右僕射) 한림학사(翰林學士)인 신(臣) 최자(崔滋)가 왕명(王命)을 받들어 짓고 수선사(修禪社) 도인(道人) 신(臣) 탁연(卓然)이 교칙(敎勅)에 의(依)하여 쓰다
<음기(陰記)의 본문은 결락과 탈락이 많아 문맥이 연결되지 않으므로 번역을 생략함.>
…… 부도(浮屠) 항덕행여국사자(况德行如國師者) 의사전참(宜事鐫鑱) 용도불후(用圖不朽) 시이(是以) 상명이문순공(上命李文順公) 찬비명시(撰碑銘時) 방다고력(方多故歷) ▨여재미황▨▨금지추밀원(▨餘載未遑▨▨今知樞密院) …… 지원천두륜(志遠踐頭輪) 중창이신지(重刱而新之) 수여국사고제천영등(遂與國師高弟天英等) 규욕▨▨미어시사(規欲▨▨未於是寺) 이달진양공(以達晋陽公) 공문우(公聞于) …… 의가찬술(宜加撰述) 연(然) 이관마보▨어금장▨비우▨▨경불용언피▨장시(以管麻補▨於錦障▨非愚▨▨更不容言彼▨葬時) 유월수▨백▨▨출오색선명(有一穗▨白▨▨出五色鮮明) ▨▨여▨개우▨▨세우(▨▨如▨蓋于▨▨細雨) 문(聞) …… 승자여부흠풍사사자(承者與夫歆風師事者) 열지좌방(列之左旁) 기여투명입사자(其餘投名入社者) 불가▨▨(不可▨▨) 사지생자천
▨지우사서(師之生自天▨至于士庶) 치성추▨의위복리(馳誠追▨倚爲福利) 기몰야(其沒也) 추념유▨(追念遺▨)
▨재(▨財)
▨진(▨眞)
▨영(▨英)
인영(仁英)
종원(宗遠)
▨▨
▨심(▨心)
▨
▨
▨
▨▨
▨▨
지량(支亮)
승통(僧統) 처심(處深)
선사(禪師) 홍언(洪言)
▨▨
수좌(首座) 장기(壯機)
홍균(洪鈞)
▨현(▨玄)
극▨(克▨)
양가승록(兩街僧錄) 교▨(皎▨)
삼중(三重) 홍혜(洪慧)
▨신(▨神)
▨청(▨淸)
대선(大選) 추열(隹悅)
지척(智彳)
▨심(▨諗)
거식(巨植)
수원(守源)
전일(全一)
대유(大有)
비구니(比丘尼) ▨민(▨敏)
청원(淸遠)
희원(希遠)
정심(正心)
공경대부명호(公卿大夫名號)
양양공(襄陽公) 서(恕)
진양공(晋陽公) 최씨(崔氏)
광릉후(廣陵侯) 면(沔)
영인후(寧仁侯) 진(稹)
수사공(守司空) 희(禧)
수사공(守司空) 위(瑋)
시중(侍中) 최종준(崔宗俊)
평장사(平章事) 최홍윤(崔洪胤)
평장사(平章事) 박문성(朴文成)
평장사(平章事) 김중귀(金仲龜)
참지정사(參知政事) 정숙첨(鄭俶瞻)
참지정사(參知政事) 정방보(鄭邦輔)
참지정사(參知政事) 임경숙(任景肅)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 홍균(洪鈞)
판병부사(判兵部事) 김원의(金元義)
▨복사(▨僕射) 이세장(李世長)
좌복사(左僕射) 기저(奇泞)
판추밀원사(判樞密院使) 정안(鄭晏)
지추밀원사(判樞密院使) 최항(崔沆)
추밀원사(樞密院使) 이윤성(李允誠)
추밀원사(樞密院使) 박문비(朴文備)
추밀원사(樞密院使) 전보귀(田甫龜)
추밀원사(樞密院使) 홍사윤(洪斯胤)
추밀원사(樞密院使) 이수 ▨(李氵 ▨)
추밀원사(樞密院使) 임경겸(任景謙)
추밀원사(樞密院使) 손▨(孫▨)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 정무(鄭畝)
한림학사(翰林學士) 임▨▨(任▨▨)
우복사(右僕射) 최종재(崔宗梓)163)
우복사(右僕射) 설신(薛愼)
형부상서(刑部尙書) 박훤(朴暄)
판각문사(判閣門事) 최계년(崔桂年)
상장군(上將軍) 정존실(鄭存實)
상장군(上將軍) 노인수(盧仁綏)
판비서성사(判秘書省事) 조수(趙脩)
대사성(大司成) 유충기(劉冲祺)
판사재사(判司宰事) 노관(盧琯)
판사재사(判司宰事) 전순(田珣)
판위위사(判衛尉事) 최신윤(崔臣胤)
좌승선(左承宣) 정▨(鄭▨)
예빈경(禮賓卿) 채상정(蔡祥正)
예빈경(禮賓卿) 최우선(崔于宣)
판소부감사(判少府監事) 이굉(李紘)
판사재사(判司宰事) 임경순(任景珣)
간의대부(諫議大夫) 김군수(金君綏)
간의대부(諫議大夫) 유준공(劉俊公)
전중감(殿中監) 이▨(李▨)
판사재사(判司宰事) 임경필(任景弼)
비서감(秘書監) 김효인(金孝印)
판대▨감(判大▨監) ▨▨▨
대부경(大府卿) ▨▨
위위경(衛尉卿) 최화▨(崔和▨)
비서감(秘書監) 정▨▨(丁▨▨)
대경(大卿) 송겸▨(宋謙▨)
대경(大卿) 박윤▨(朴允▨)
대경(大卿) 고▨거(高▨擧)
대장군(大將軍) 노준(盧浚)
대장군(大將軍) 박수(朴綏)
대장군(大將軍) 선대유(鮮大有)
대장군(大將軍) 채극평(蔡克平)
대장군(大將軍) 홍승우(洪承禹)
대장군(大將軍) 김광려(金光呂)
국자제주(國子祭酒) 이장용(李藏用)
이부시랑(吏部侍郞) 갈남성(葛南成)
예부시랑(禮部侍郞) 김공졸(金公椊)
예부시랑(禮部侍郞) 민적균(閔迪鈞)
호부시랑(戶部侍郞) 최순▨(崔淳▨)
호부시랑(戶部侍郞) 서왕▨(徐王▨)
장군(將軍) 박원▨(朴元▨)
장군(將軍) 이당주(李唐柱)
장군(將軍) ▨극▨(▨克▨)
장군(將軍) 이▨▨(李▨▨)
장군(將軍) ▨▨▨
장군(將軍) ▨▨▨
장군(將軍) ▨원▨(▨元▨)
장군(將軍) ▨▨▨
장군(將軍) ▨▨식(▨▨植)
어사중승(御史中丞) ▨▨▨
군기감(軍器監) ▨▨
사재소경(司宰少卿) 김공량(金公亮)
예부랑중(禮部郞中) 백경선(白景瑄)
예부랑중(禮部郞中) 안효▨(安孝▨)
예부랑중(禮部郞中) ▨홍균(▨洪鈞)
호부랑중(戶部郞中) 서▨(徐▨)
중랑장(中郞將) 김광(金光)
좌사간(左司諫) ▨▨
좌사간(左司諫) 민광균(閔光鈞)
좌사간(左司諫) 위돈겸(魏敦謙)
예부원외랑(禮部員外郞) 송공단(宋公旦)
▨부원외랑(▨部員外郞) ▨▨▨
예부원외랑(禮部員外郞) 손▨(孫▨)
호부원외랑(戶部員外郞) ▨숭(▨崇)
호부원외랑(戶部員外郞) 위▨(魏▨)
낭장(郎將) ▨▨▨
낭장(郎將) 김왕(金王)
낭장(郎將) 채윤희(蔡允禧)
낭장(郎將) 노왕(盧王)
낭장(郎將) 최▨화(崔▨和)
각문지후(閣門祗侯) 최종보(崔宗輔)
각문지후(閣門祗侯) ▨▨
▨▨거사(▨▨居士) 이▨덕(李▨德)
혈암거사(頁庵居士) 최▨(崔▨)
금강거사(金剛居士) ▨▨▨
거사(居士) 노수효(盧氵 孝)
녹사(錄事) 유춘(柳椿)
녹사(錄事) 박윤장(朴允璋)
▨제(▨第) 이극촌(李克村)
검교소감(檢校少監) 배윤량(裴允亮)
검교장군(檢校將軍) ▨백▨(▨白▨)
우파이(優婆夷)
연희궁주(延禧宮主) 왕씨자광(王氏慈光)
금관국대부인(金官國大夫人) 최씨(崔氏)
정화택주(靜和宅主) 왕씨(王氏)
수성궁주(綏成宮主) 임씨(任氏)
영안궁주(永安宮主) 정씨(鄭氏)
하동군부인(河東郡夫人) 정씨(鄭氏)
하동군부인(河東郡夫人) 정씨(鄭氏)
▨초군부인(▨稍郡夫人) 사씨(史氏)
문인(門人)
▨금(▨金) 명장(明藏)
정수(正氵) 종▨(宗▨)
간사입석(幹事立石)
도자(道者) 종연(宗然) 귀 부(龜 夫)
도자(道者) 수담(守湛) 종례(宗禮)
간자(刊字)
경술(庚戌) 4월(四月) 일(日) 상석(上石)
영암군부사관구학사각문지후(靈巖郡副使管句學事閣門祗侯) 이주(李湊)
입비차사원지승평군부사각문지후(立碑差使員知昇平郡副使閣門祗侯) 송여(宋輿)
도강군감무위위주부(道康郡監務衛尉注簿) 송관(宋寬)
감역(監役) 영암군리(靈巖郡吏) ▨국검(▨國儉)
[출전 : 『校勘譯註 歷代高僧碑文』【高麗篇4】(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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