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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경도(瓊島)/금수정 옆 초대형 초서/ 누가 썼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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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환 작성일18-12-31 13:00 조회760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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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도(瓊島)/금수정 옆 초대형 초서 누가 썼는가?

솔내 김영환(solnae@empa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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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수정(金水亭)은 조선선비들이 가장 많이 찾았던 곳이다. 금수정을 주제로 쓴 시만 60명이 넘고 금수정을 다녀간 명사들은 수백명으로 이루 헤아릴 수 조차 없다. 금수정의 아름다움이야 더할 나위 없겠지만 금수정 아래로 흐르는 영평천이야말로 영평팔경을 아우르는 절경이다. 이 영평천에는 수많은 암각문이 남아 있는데 그중에서 금수정 주변의 암각문과 창옥병 주변의 암각문이 유명하다.

금수정주변의 암각문은 조선 중기 봉래(蓬萊) 양사언의 초서로 된 증금옹(贈琴翁)시(詩)가 새겨지면서 유명해 졌다. 그 이후 석봉(石峯) 한호, 한음(漢陰) 이덕형등 여러 시인묵객의 글씨가 새겨져 있다. 그중에서도 영평천 가운데 새겨진 증금옹(贈琴翁)시와 준암(尊嵒) 경도(瓊島)가 눈에 도드라지고, 금수정 입구에 있는 동천석문(洞天石門)과 회란석(廻蘭石), 마애절벽에 새겨진 금수정(金水亭)도 눈여겨 볼만하다.

특히 초서로 된 경도(瓊島)는 그 크기가 가로 90cm 세로230cm 되는 대작으로 <포천의 암각문> (홍순석;한국문화사 1997.2.)에서 홍순석교수는 경도(瓊島)의 크고 웅장함을 말하면서 ‘본래 양사언은 큰 글씨를 잘 썼던 명필가이나, 이처럼 규모면에서 큰 자료는 매우 희귀하다. 양사언이 금수정에서 소요하며 각자했을 개연성이 짙다.’ 라고 쓰고 있다. 또 ‘금수정 지역 암각문 가운데, <자료2;6>[증금옹시] <자료2;7>[경도]는 매우 중시되는 자료이다. 이 두 자료는 모두 양사언의 필적이다’ 라고 써서 경도(瓊島)가 봉래 양사언의 필적으로 못박아놓았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는 좀 의문이 든다. 봉래 양사언(1517년;중종12~ 1584년;선조17)이 증금옹(贈琴翁)시를 짓고 바위에 새겨놓은 이후 동주(東州) 이민구(1589년;선조22~1670년;현종11), 서계(西溪) 박세당(1629년;인조7~1703년;숙종29), 지촌(芝村) 이희조(1655년;효종6)~1724년;경종4), 뇌연(䨓淵) 남유용(1698년;숙종24)~1773년;영조49), 월곡(月谷) 오원(吳瑗)(1700년;숙종26-1740년;영조16)등 많은 문사들이 바위에 새겨진 증금옹(贈琴翁)시를 언급했지만 그 옆에 있는 경도(瓊島)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없다. 만약 대형 초서 경도(瓊島)가 당시에 증금옹(贈琴翁)시 옆에 새겨져 있었다면 증금옹(贈琴翁)시를 언급하면서 바로 옆에 웅장한 초서 경도(瓊島)를 못 보았을 리가 없고, 보았다면 경도(瓊島)에 대해서도 한마디 했음직한데 전혀 없다.

이후 경도(瓊島)에 대한 기록이 처음 나타나는 것은 봉래 양사언(1517년;중종12~ 1584년;선조17)보다 100년후에 태어난 보만재(保晩齋) 서명응(1716년;숙종42~1787년;정조11)의 문집 보만재집에서 볼 수 있다.

보만재집 <東遊山水記 金水亭>편에서 ‘바위위에 동천석문과 백운계가 새겨져있는데 이는 석봉 한호의 글씨이다. 회란석은 중국사신 허국의 글씨이고 금수정은 봉래 양사언의 글씨이다. 조대는 금수정주인 김씨의 글씨이다.(石之上刻曰洞天石門。曰白雲溪。石峯韓濩筆也。曰廻瀾石。天使許國筆也。曰金水亭。蓬萊楊士彦筆也。曰釣臺。亭之主金氏筆)라고 쓰고, 내 가운데 와준이 있는데 여러 말 정도가 들어갈 만 하다고 하면서 그 위에 준암 경도 커다란 네 글자가 있는데 모두 김씨의 글씨이다. 또 두 편의 시가 있는데 이는 양사언의 글씨이다(中凹窪可容數斛。上刻尊巖瓊島四大字。皆金氏筆。二詩。楊士彦也。)라고 했다.

 


金水在永治西五六里。由亭而左。水汨㶁流。怒而爲濤。激而爲沫。綿亘六七里。至亭之側。怪石簇焉。有壁而竪者。舟而臥者。獸踞而人立者。皆靑楓倒植。遠見若苔蘚然。石之上刻曰洞天石門。曰白雲溪。石峯韓濩筆也。曰廻瀾石。天使許國筆也。曰金水亭。蓬萊楊士彦筆也。曰釣臺。亭之主金氏筆也。水洄洑石底。泓澄泂澈。遊魚可數。轉而彎抱深碧。上涵亭影。又轉而縈匯漫流。以出亭右。外列奇峯。高可數十丈。廣延數里。方夏草樹茂密。影瀉溪水。若畵圖然。洲落沙出。瑩白如雪。有石在其邊。中凹窪可容數斛。上刻尊巖瓊島四大字。皆金氏筆。二詩。楊士彦也。

 


이어서 연경재(硏經齋) 성해응1760년;영조36~1839년;헌종5)의 문집에서 등장하는데,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연경재집 <詩話 편 蓬萊詩句>에서 증금옹(贈琴翁)시를 소개하면서 이 시가 경도(瓊島)옆에 새겨져 있다(刻于洞陰金水亭瓊島之傍)라고 했다.

또 <題楊蓬萊筆刻後 >에서도 금수정(金水亭) 편액은 봉래 양사언이 썼다고 하면서, 증금옹(贈琴翁)시가 경도(瓊島)옆에 새겨져 있다고 했다. (金水亭扁。亦蓬萊筆也。蓬萊筆多刻在巖石間。而瓊島之傍 所刻尤奇。卽亦所自製也。詩曰。綠綺琴伯牙心。一皷復一吟。鍾期是知音。泠泠虗籟起遙岑。江月娟娟江水深。)

 


보만재 서명응(1716년;숙종42)~1787년;정조11)이나 연경재 성해응(1760년;영조36~1839년;헌종5)이 경도(瓊島)를 언급하면서도 금수정 주인 김씨가 썼다고만 해서 과연 누구인가를 알 수가 없다.

 


1841(헌종7)년 에 금강산을 가면서 금수정에 들린 기록이 있으니 금강일기 부 서유록(金岡日記 附 西遊錄)이다.

금강일기 부 서유록(金岡日記 附 西遊錄)의 「서유록(西遊錄)」에서 저자가 성을 강(姜)이라고 밝혀진 그는 금강산은 신축(1841)년에 벗들과 함께 떠났으며 서유(西遊)는 의주부윤의 도움을 받아 병오(1846)년에 다녀와 기록한다.

금강일기 부 서유록(金岡日記 附 西遊錄)이 2005년, 조용호(목포대 교수) 역으로 『19세기 선비의 의주, 금강산 기행』이라는 제목으로 출간이 되었다.

 


○1841년 윤삼월 이십칠일. 신사일. 맑음.

아침식사 후 팔경을 보기 위해 길을 나섰다. 팔경이라는 것은 청학동, 백로주, 낙귀정, 금수정, 창옥병, 와룡암, 화적연, 선유담을 말한다. 박생원(哲榮)의 집에서 15리쯤 되는 곳에 금수정이 있었기 때문에 우선 거기부터 가서 관광을 했다. 면면이 기이한 절경이었는데, ‘금수정’이라는 현판과 ‘준암(罇巖)’이라는 석각은 양봉래(楊蓬萊 사언)의 필적이었고 ‘통천석문(洞天石門)’과 ‘부운벽(浮雲壁)’은 한석봉(韓石峯 호)의 필적이었다.

위 아래로 두루 관람한 뒤에 묵을 곳을 찾으니, 집주인은 곧 안동 김씨인 김연천(金漣川)의 집이었다. 그 형제는 매우 순박하고 후한 사람들로 여러 대에 걸쳐 이곳에 거주했는데, ‘경도조대(瓊島釣臺)’라는 글씨는 그들 선조의 필적이라고 하였다. -이하 생략

 


(金岡日記 附 西遊錄)

辛丑(1841) 後三月(윤삼월)

二十七日 辛巳 晴 朝茶後 爲觀八景之行 蓋八景者 靑鶴洞 白鷺洲 樂歸亭 金水亭 蒼玉屛 臥龍巖 禾積淵 仙遊潭也 自朴哲(榮)家十五里許 有金水亭 故爲先往觀之 面面奇絶 金水亭懸板與 罇巖石刻 楊蓬萊筆 洞天石門與浮雲壁七字 韓石峯筆也 上下周覽後訪主人 主人安東金漣川家也 其昆季甚醇厚 屢世居此 而瓊島釣臺乃其先祖筆云 又五里許有玉屛書院 卽金文谷 朴思菴 李峒隱 影幀奉安所也 祗謁後還至金水亭村舍中火 仍卽發程 至楡亭十里許 歇宿- 이하생략

 


 


김연천(金漣川)은 연천현감을 지낸 김의우(金義友 1771-1858)이다.

 


이후 한유 (韓愉 1868~1911, 고종5~왜정2)가 기행문(西行程曆)을 쓰면서 금수정에서 하룻밤을 잔 기록을 찾아낼 수 있었다.

 


서행정력(西行程曆) 이월 계사 십오일 (二月 癸巳 十五日 );서기 1893년 고종30년

‘척약재 후손인 도사 김춘경을 방문한 후(訪金都事春卿丈惕若齋后) 금수정에 올랐다. 금수정은 본래 서자인 김윤복의 소유였으나 지키지 못하고 양사언에 넘어갔다가 다시 김씨에게 되돌아 왔음(登金水亭。亭舊為金氏別業。有孽子胤福。不能守。 則以亭傳之楊蓬萊士彦。 其后蓬萊復還之金家云)을 말하고, 동천석문과 부운벽은 한석봉이 쓰고 회란석은 중국사신 허국이 썼으며 백운루는 옥동 이서가 썼다 (曰洞天石門。曰浮雲壁者。韓石峯筆也。曰囬瀾石者。明儒許國筆也。曰白雲樓者。玉洞李溆筆也), 또 냇가에 있는 술동이바위를 말하며 준암(尊喦)은 역시 봉래 글씨이고 경도(瓊島)는 김상사(김상원)의 증조부 글씨(尊喦二字。亦蓬萊筆也 又 刻瓊島者。金上舍都事曾祖名某筆也。)라고 하여 경도의 친필자를 짐작할 수 있다.

여기에서 말하는 도사 김춘경(金春卿)은 김상원(金相元 일명 金榮國)이다. 김상원은 척약재학음집 중간본의 서문을 쓴 사람으로 의금부 도사를 지냈다. 金相元(榮國1833-1918)의 증조부는 바로 금수정을 중건한 김택인(金宅仁)이다. (金宅仁-金定浩-金義友-金相元)

 


1899(大韓帝國 光武3. 己亥)년 금수정을 방문하여 김상원(金相元 일명 金榮國)을 만난 사람이 또 있었으니 남곡(南谷) 염석진(廉錫珍;1855-1932)이다. 남곡은 그의 저서 남곡유고 원유일기 1899년 5월2일자에 이렇게 적고 있다.

 


기해년(1899년) 봄 5월2일/ 40리를 걸어 금수정(金水亭)에 올라서 도사(都事) 김상원(金相元)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수석(水石)의 청고(淸古)함과 금수정[臺塮]의 아름다움이 산북(汕北)의 제일이라 한 것이 지나친 말이 아니다. 물가에 각석(刻石)이 있는데 존암(尊岩)이라 하고, 연화암(蓮花岩)이라 하고, 부운벽(浮雲壁)이라 하고, 금대(琴臺)라 하고, 백운계(白雲溪)라 하고, 환선대(喚仙臺)라 한 것은 양봉래(楊蓬萊)가 쓴 것이고, 동천석문(洞天石門)이라고 한것은 한석봉(韓石峯)이 쓴 것이고 , 회란석(廻瀾石)이라고 한것은 명나라 학사 허국(許國)이 쓴 것이다. 조대(釣臺)하고, 경도(瓊島)라고 한 것은 도사(金相元)의 9대조가 쓴 것이다.

조금 가서 창옥병에 이르러.... 하략

(南谷遺稿 坤 券之三 遠遊日記

翌日行四十里登金水亭與主人金都事相元氏敍話其水石之淸古臺榭之佳麗雖謂汕北第一不爲過語矣水際有刻石曰尊岩曰蓮花岩曰浮雲壁曰琴臺曰白雲溪曰喚仙臺楊蓬萊所書曰洞天石門韓石峯所書曰廻瀾石明學士許國所書曰釣臺曰瓊島都事九代祖所書也 行少許抵蒼玉屛-이하생략)

 


여기에서 김상원의 9대조는 김확(金矱)이다.

[1.김상원(김영국;1833-1918) 2.김정호(1800-1853) 3.김의우(1771-1858) 4.김택인(1753-1825) 5.김형(1715-1771) 6.김가신(1688-1728) 7.김경복(1662-1713) 8.김환(1637-1677) 9.김정지(1600-1641) 10.김확(1572-1633)]

김확(金矱)은 철원부사와 상의원정을 지냈으며, 금수정을 복축(卜築)하면서 현재의 종택으로 쓰이는 별서(別墅)를 지은 분이다.

 


경도(瓊島)의 친필자는 김택인(金宅仁)과 김확(金矱)으로 좁혀지는데 김택인(金宅仁)의 생졸년을 보면 1753-1825년이고 김확(金矱은 1572-1633년이다. 서명응(1716년;숙종42)~1787년;정조11)이나 성해응(1760년;영조36~1839년;헌종5)이 생전에 경도를 방문하고 글을 쓴 것으로 보아 김택인(金宅仁)보다는 김확(金矱)일 가능성이 짙다. 또 금강일기 부 서유록(金岡日記 附 西遊錄)에서 김의우(金義友)는 경도가 선조의 글씨라고 했다. 김택인(金宅仁)은 바로 김의우(金義友의 아버지이니 선조라고 할 리가 없으므로 김택인(金宅仁)은 아니라고 볼 수 있다.

 


이로써 경도(瓊島)의 친필자자 그 웅대하고 휘날리는 필체로 보아 양사언의 필적으로 의심하였으나 척약재 종손가의 김확(金矱)으로 추정된다.

 


2018.5.25 솔내 김영환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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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김재영님의 댓글

profile_image 김재영
작성일

논리로 보아 딱 드러맞네요
새해 복많이 받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