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백리에 선정된 선조님 5분-김수(金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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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만 작성일20-05-01 07:21 조회1,199회 댓글0건본문
청백리에 선정된 선조님 5분-김수(金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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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수(金睟):명종2년(1547)∼광해군7년(1615).
할아버지는 첨지중추부사 김노(金魯)이고, 아버지는 사재감정(司宰監正) 김홍도(金弘度)이며, 어머니는 이계백(李繼伯)의 딸이다. 본관은 안동(安東)이며, 자(字)는 자앙(子昻)이고, 호는 몽촌(夢村)이다.
선조 즉위년(1567) 생원시에 합격하였고, 선조 6년(1573)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 후 예문관검열을 지냈고, 이듬해 홍문관 정자·저작을 거쳐 예문관 봉교가 되었다가 사헌부 감찰로 승진하였다. 이어 정언·수찬을 지내고 교검으로 동지사의 서장관이 되어 명나라에 갔다 이듬해 돌아와서 사헌부지평·성균관직강 등을 역임하고 홍문관 교리가 되었을 때 왕명으로 『십구사략十九史略』을 개수(改修)하고 주(註)를 붙였다.
1582년 헌납·이조좌랑 등을 거쳐 선조 16년(1583) 오랑캐가 침입해 경원부(慶源府)가 함락되자 이조정랑으로 도순찰사 정언신의 종사관이 되어 적을 격퇴하였다. 같은 해 평안도 순안(巡按)어사가 되었고 이듬해 평안도에서 병이 심해 인사불성이 되었다는 보고가 있자 “애석한 일이다. 경의(京醫)에게 약을 가지고 빨리 달려가 구료하게 하라.”하였다. 그 후 직제학을 지내고 1586년 승지 등을 거쳐 1587년 평안도관찰사로 갔다가 1589년 경상도관찰사가 되었다.
1590년 부제학이 되었고, 이어 대사헌·병조판서·이조판서 등을 역임하고 1591년 다시 경상우감사(慶尙右監司)가 되었는데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이 발생하자 감영(監營)이 있는 진주를 버리고 거창으로 도망가면서 각 고을에 격문을 돌려 백성들에게 적을 피하라고 통고하니 도내가 텅 비어 왜적을 방어할 수 없었다.
또한 전라감사 이광(李洸)과 충청감사 윤국형이 근왕병(勤王兵)을 일으키자 그는 겨우 100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참가하였다. 그러나 근왕병이 용인에서 패하자 경상우도로 되돌아가 영남초유사(招諭使) 김성일로부터 패전에 대한 질책을 받았다.
또한 당시 의령에서 의병을 일으켰던 곽재우와 불화가 심해 김성일의 중재로 무마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일로 지방 사람들로부터 업무처리 하는 것이 조급하고 각박할 뿐만 아니라 왜적과 싸우지 않고 적을 피해 도망갔다는 비난을 면치 못하였다.
선조 25년(1592) 8월 한성부판윤이 되었고 3도순찰사로 제수되었으나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가 지중추부사 등을 역임하였고, 1593년 중국 사신의 접반사가 되었으며 사은사 부사로 명나라에 갔다가 이듬해 돌아와 우참찬이 되었다. 이어 호조판서가 되어 군량미 조달에 고생하였으며 다시 동지중추부사로 명나라 사신 및 장수의 접반사로 활동하였다.
선조 29년(1596) 호조판서로서 전라도와 충청도에서 명군(明軍)의 군량을 충당하는데 능력을 인정받았으며, 그 뒤 영중추부사에 이르렀다. 1600년 또 호조판서가 되고 1604년 염근리에 선정되었으며 광해군 즉위년(1608) 다시 호조판서가 되고 다음해에는 동지중추부사가 되었는데 광해군 5년(1613) 계축옥사 때 손자 김비(金祕)가 무고로 옥사하자 그도 대간들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고 2년 후 병으로 사망하였다.
이황의 문인으로 백사(白沙) 이항복이 그의 죽음을 듣고 나라의 충신을 잃었다고 한탄했다고 한 반면 유학(幼學) 신급의 상소 속에 조정에서 권력을 마음대로 행사하는 인물로 지적되기도 하였다. 저서로 『몽촌집夢村集』이 있으며 시호는 소의(昭懿)이다.
<대동장고에는 수록되어 있지 않고 청선고와 전고대방에는 김수(晬)로 되어있는데 여러 자료를 보면 김수(金睟)가 맞음.>
《출처 : 조선의 청백리222 pp71~73/문학박사 조성린/조은출판사/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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